[정신의학신문 :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사연 -

30대 직장인입니다. 회사에서는 늘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합니다.

다들 저를 보고 젠틀하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집에서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무뚝뚝한 얼굴이 됩니다. 가족들이 질문을 해도 단답형으로 대답할 뿐이에요.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집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귀찮습니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런 저 때문에 가끔은 어머니가 상처를 받으시기도 하는데요. 그때마다 죄책감이 큽니다.

직장 동료나 친구들보다 가족들이 더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들인데, 왜 그들에겐 차갑게 대하는 걸까요?

제가 너무 못된 걸까요? 괴롭습니다.


 
A) 가족들이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더 예의를 잊어버리잖아요.

비슷한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요. 회사에서는 항상 웃다가, 집에 와서 자녀에게 별 것 아닌 일로 짜증을 내기도 하고.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자신도 모르게 배우자에게 쏟아내기도 하죠. 

사연을 주신 분이 “집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귀찮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한 것을 보면, 자아 고갈(Ego depletion) 상태가 아닌가, 의심이 됩니다.

이건 예의를 잊어버리는 문제라기보다는, 회사에서 에너지를 다 소진해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좋은 감정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어진 겁니다.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시켜 버려서, 사랑하는 가족을 보듬어주기 어려워지는 것이지요.

 

사진_픽사베이

 

Q) 자아 고갈이라고요? 그건 어떤 의미인가요?

A) 근육을 무리해서 너무 많이 쓰면, 피로에 빠지죠. 그러면 더 이상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지죠.

마찬가지로 정신적 에너지가 소진되면 감정을 조절하고, 충동을 억제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능력이 마비되고 맙니다.

이런 상태를 '자아 고갈 상태'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자동차에 연료가 바닥난 것이죠.  

 

긍정적인 감정 상태를 유지하고, 친절하고 따뜻하게 마음을 표현하려면 내면에 충분한 에너지가 남아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아 고갈 상태에서는 이렇게 하기 힘듭니다.

자아 고갈 상태에서는 수동적이고, 자동적인 반응이 많아집니다. 만사가 다 귀찮고, 자발성도 떨어지고, 말도 하기 싫어집니다. 웃는 표정조차 짓기 힘들어지고요.

그냥 하던 대로 하게 되고. 결정하기 어려워지고 실행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과민 반응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소한 것에도 짜증이 나고, 예민해집니다. 감정이 폭발하기도 하고요.

 

Q) 이런 상태는 언제 잘 일어나나요?

A) 감정 노동에 시달리는 경우, 자아 고갈에 잘 빠집니다.

고객에게 항상 웃고, 화가 나도 참고, 억지로 감정을 통제하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육체노동 이상의 정신 에너지를 써야 합니다.

감정 노동으로 에너지를 많이 써버리게 되면, 집에 와서 감정 표현이 무뎌지거나, 짜증이 늘어나죠.

감정 노동까지는 아니더라도, 과도하게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자기 모습을 좋게, 긍정적으로 만들려고 통제하다 보면 자아 고갈에 빠질 수 있어요.

하루 종일 직장에서 시달린 맞벌이 부부는, 부부 관계에 큰 문제가 없어도, 부부 싸움을 하게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남편이, 그리고 아내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감정을 조절할 힘이 떨어져서 서로에게 예민해진 것이지요. 

 

Q) 그렇다면.. 자아 고갈 상태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나요? 

A) 평소보다 더 예민해졌거나, 어떤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나를 더 열 받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든가, 평소보다 성욕이나 식욕을 억제하기 더 힘들 때는 자아 고갈 상태를 의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단순한 일에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든가, 일을 자꾸 미루게 되면 자아 고갈 상태를 의심해봐야 합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내가 예의 바르지 않은 사람 아닌가, 실행력이 떨어지는 사람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더 괴롭히지 말고요. 감정을 과도하게 통제하고, 마음 에너지를 회사에서 과도하게 써버려서 자아가 지치고, 소진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분이 가족을 소홀히 생각한다거나 무시한다고 말할 순 없겠죠?

정말로 가족을 소홀히 대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을 겁니다.

사연을 주신 분은, 어머니에게 퉁명스럽게 대하고 나서, 후회를 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있거든요.

죄책감을 느끼면 괴롭기는 하지만, 자기 행동을 스스로 평가하고 교정하려는 마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니까, 앞으로 좋은 방향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있죠.

 

회사에서 하루 종일 스트레스받고, 일 때문에, 직장 상사나 동료 눈치 보고, 고객 응대하느라 힘을 다 빼버리고 돌아와서도 다정다감한 남편이나 아내, 자식이 되기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약해 빠져서,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죠. 이기적이라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시켜 버렸기 때문인 거죠.

한 곳에 지나친 의지력을 쓰면, 다른 곳에서 반드시 구멍이 생깁니다. 

 

사진_픽셀

 

Q) 안에서와 밖에서의 모습이 다르지만 그 차이가 크다면.. 문제일 것 같은데요?

A) 사회생활에서 모습이 다르고, 집에서 모습이 다르고... 이렇게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는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항상 일관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더 좋지 않습니다.

밖에서도 항상 웃는 젠틀맨이고, 친구를 만나도 젠틀맨이고, 집에서도 젠틀맨이고... 항상 똑같은 모습을 보이려고 하면, 짧은 기간 동안은 이렇게 할 수 있지만, 얼마 못 가 지칩니다.

밖에서는 스마일맨이지만, 혼자 있을 때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는 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게 정상이죠.

 

Q) 사연을 주신 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이럴 때는 자신을 더 쥐어짜려고 할 것이 아니라, 건강한 음식을 먹고 충분히 쉬어줘야 합니다.

대체로 2주 정도, 무리하지 않고 충분히 쉬어주면 회복됩니다. 피로가 누적되거나, 과음을 하면 문제가 더 커지니 이런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실용적인 팁 하나를 알려드리면... 회사나 집 근처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하세요. 퇴근하고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말고, 피트니스 센터에서 30분만 빠르게 걷고, 샤워하고 집에 들어가는 겁니다.

회사에서 누적된 감정들을 집으로 가져가지 말고, 몸으로 풀고 들어가세요. 운동이 아니라도, 기분 전환이 될만한 활동을 하고 집에 가는 것도 좋습니다.

제 환자 중에는 좋아하는 단골 음식점에서 혼자 파스타 먹고 들어가기도 하고, 한강에서 한 시간 정도 자기 좋아하는 장소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다가 들어간다고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아이쇼핑하고 들어가는 분도 있고.

이렇게 누적된 피로나, 쌓여 있는 감정을 외부에서 쏟아버리고 집에 들어가면 가족에게 부드럽게 대할 수 있으니까요.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전체기사 보기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