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얼마 전 존스홉킨스 대학의 연구팀은 인간의 뇌에서 ‘자유의지의 형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발견하였다고 발표했다. 순수한 자의적 결정을 만들어내는 뇌의 활동을 MRI를 통해 촬영한 것이다. 어떠한 판단을 우리 스스로가 자체적으로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는 과정을 그 어느 때보다 정교하게 객관적인 관측자료로 담아냈다.

연구팀은 실험에 참가한 참가자들로 하여금 화면에 띄워진 중앙의 점을 응시하도록 한 뒤 그 곳을 중심으로 우측과 좌측 양쪽에 여러 가지 색의 숫자나 알파벳들을 제시했다. 그리고 중앙의 점을 응시하되 참가자가 오른쪽과 왼쪽 각각의 숫자-알파벳들 중 어느 쪽에 집중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동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하기 위해 참가자들의 뇌는 실시간으로 f-MRI(뇌자기공명영상장치)에 연결되었다. 참가자들에게는 화면을 바라보는 것 이외에 어떠한 명령도, 요구도 주어지지 않았다. 어떠한 외부 요인도 없이 참가자가 스스로-마음대로 오른쪽, 왼쪽으로 주의를 전환하는 것. 이러한 형태의 ‘자의적 결정과 행동’가 발현될 때의 뇌의 활동을 포착해낸 것이다. ‘자유의지’의 모습을 말이다.

 

중세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다. 인간이 악하게 행동하는 이유,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게 되고, 자유의지에 의해 세상에 악이 존재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랜 시간 고뇌했다. 인간이 과연 완전한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그저 기계처럼 신의 섭리대로 흘러가는 세계의 일부분인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인간들은 분명 악하게 행동하고 있고, 그 섭리를 관장하는 신이 있을진대 그 악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불편했다. 악함이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었다면 신은 왜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는지, 인간이 의지의 자유가 없었더라면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고 세상에 악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니 신이 원망스러워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론’은 그의 동료 에보디우스가 던지는 무게 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하느님이 모든 악의 장본인인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존스홉킨스 연구팀이 이번에 시행한 연구에서는 자의적인 주의전환(self-generated attention shift)이 발생하기 직전에 뇌의 앞부분-전두엽이 활성화되는 것을 관찰했다. 그동안의 자유의지 관련 연구들은 의지 결정의 순간을 참가자의 보고에 의해 기록했으나, 이 실험의 경우에는 주의가 전환되는 과정을 뇌의 시각피질 활성화 양상에 따라 객관적으로 외부 간섭 없이 관찰했다. 기존까지 보다 훨씬 순수한 형태의 ‘자의적’ 주의전환, 즉 자유의지에 따른 결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순수 자유 결정에 따른 행동(주의의 전환)이 일어나기 직전에 발생하는 전두엽의 활성화를 이 연구를 통해 관찰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유의지에 의해 활성화된 이 영역은 외부자극에 영향 받은-이차적 주의 전환에서 활성화 되는 영역과는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응시 화면의 오른쪽과 왼쪽 문자 중에 붉은색으로 R, L과 같은 알파벳을 의도적으로 나타나게 하여 어느 한쪽으로 참가자의 주의를 의도적으로 끌었을 때는 자유의지를 일으켰던 영역이 그렇게 활성화되지 않았다.

연구팀은 소위 ‘자유의지-Free will’이라 불리는 것의 뇌영상학적 정체가 드러났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연구팀이 낚아채 그려낸 자유의지의 그림자를 보고 있노라면 조금씩 머리가 복잡해진다. 자유의지의 찰나가 드러난 그 모습에 오히려 자유의지의 정체가 모호해진다.

 

사실 자유의지의 정체를 뇌를 통해 밝혀내고자 했던 연구는 이번 연구가 처음이 아니다. 손가락을 움직여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의지에 대해 뇌파를 관찰했던 1983년 리벳(Benjamin Libet)의 연구로부터 시작하여, 2008년 독일의 유명한 버튼 누르기 실험, 얼마 전의 캘리포니아 대학의 뇌 전극 실험까지 수많은 실험들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한다고 생각하는 작용이 발생하기 이전에 뇌의 활성이 선행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구에서는 뇌 전극의 활성화를 통해 참가자가 어떤 버튼을 누를지 예측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특정 버튼을 누르도록 유도할 수도 있음을 보인 바 있다.

어쩌면 우리가 ‘선택’했다고 생각하던 결정이란 것은 사실 뇌의 연속적인 연산과정에 따른 결과에 불과하고, ‘자유의지’라 알고 있던 것의 정체 또한 뇌세포 얼기의 연산 중에 떠오른 의식과 자아라는 소프트웨어가 만들어낸 환상의 일종이었던 것일지 모른다. 내측전두엽의 배측앞대상회와 가측전전두엽의 우측중간전뇌회가 빚어내는 뇌 연산 프로그램으로서의 자유의지......

 

라플라스는 일찍이 가상의 악마를 이야기한 바 있다. 라플라스의 악마는 과거와 현재 모든 질량의 위치와 그것의 운동량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것에 작용하는 상호작용을 계산해 모든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는 ‘미래도 과거처럼 불확실할 것은 없으며, 바로 우리의 눈앞에 보일 것이다’라고 했다. 라플라스 뿐 당대의 철학자들은 유물론적 결정론에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모든 존재는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있고, 모든 물리적 존재는 반드시 주어진 조건에 의해서만 반응하고 운동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현재는 논리적인 이유와 과정에 근거하고 있고, 모든 미래는 논리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말이다.

해묵은 시대의 철학자들뿐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그보다 한술 더 떠 절대 시공간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는 동등한 물리학적 위상을 가지고 동시에 존재함을 이야기했다. 공간 위에서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세계가 아닌 이미 통째로 동시에 존재하는, 다시 말해 미래와 과거를 아우르는 시간 덩어리가 동시에 존재하는 시공간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어떤 자유의지가 있건 어떤 선택을 하건 미래는 그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아니,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확정성을 배제하는 결정론적 세계에서 우리의 뇌는 수백억개의 뇌세포로 이루어진 잘 조립된 시계처럼 정확하게 움직이고 활성화된다. 의식이라는 애매모호한 존재가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란 것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곤 도무지 내어주지 않는다. 그저 엄밀하게 째깍째깍 움직인다. 의식은 다만 착각한다. 본인이 선택했다고.

 

이번에 존스홉킨스 대학의 연구팀이 밝혀낸 바와 같이, 앞으로 시간이 지나 우리의 뇌를 들여다보고 분석해 내는 기술이 발달할수록, 우리의 의식이 갖는 그 해부학적 생리적 얼기 또한 조금씩 그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비록 그 완연한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영영 불가능할지 몰라도, 형이상의 영역에 있던 것들을 하나씩 과학의 수식으로 설명해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유의지와 인간 영혼의 형이상학적이고 신성한 위치는 설자리가 갈수록 비좁아질지 모를 일이다. 물론 현대 과학은 불확정성의 원리의 힘을 빌려 과거의 유물론적 결정론을 다소 퇴색시켰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의지가 하나씩 환원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못내 불편하다. 어차피 지금 나의 결정이 나의 온전한 결정이 아니라면, 나의 의지가 단순히 생물학적 반응에 불과하다면 나의 의지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겠는가. 무기력한 물음에 불편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의 악’이라는 주제가 양립하는 괴로운 고뇌를 딛고 일어서며 “우리는 자유의지 없이는 올바르게 살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느님이 인간에게 의지의 자유를 주신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천명했다. 하느님이 우리의 선택의 결과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미래를 알지 못하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다만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 육체적 욕망과 교만한 악을 향하지 않고 하느님을 향할 수 있도록, 하느님을 향한 절대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능력인 의지와 자유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큰 은총의 선물인 것이다. 자유 의지가 없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세상에는 악이 없을 수도 있지만,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선의 의지 또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지의 자유는 인간이 선해질 수 있도록 해주는,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고귀한 능력이자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고상한 품위인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어떠한 미래가 오건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지금에나 그때에나 언제나 ‘선택’하고 ‘결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쪽배에 올라타 폭풍우를 헤쳐간다 하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노를 저어야 한다. 물결에 휩쓸려 스스로를 흩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혼신을 다해 노를 저어야 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처럼, 우리의 존재는 우리의 의지와 선택 그 자체만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였듯 우리는 의지를 갖는 것만으로도 벅차도록 값지다. 그것이 비록 환상과 착각에 그치는 의지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꿈꾸고 자유롭게 나아가기 위해 부단히 발버둥 친다. 부단히 고뇌하고 번민하고 노력한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은 그 치열함에서 이미 존재를 충분히 드러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참고자료 : Tracking the will to attend: Cortical activity indexes self-generated, voluntary shifts of attention, Attention, Perception, & Psychophysics, October 2016, Volume 78, Issue 7, pp 2176–2184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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