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장승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몸이 아프거나 집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회사에 휴가를 신청합니다. 최근에는 연차 사유를 묻지 않는 것이 추세이지만, 사유를 밝혀야 하는 상황이라면 병원 진료나 집안 대소사로 인한 개인 사정, 은행 업무, 관공서 방문 등을 이유로 제출하곤 합니다. 이런 사유에 대해서는 굳이 더 물어보는 경우도 잘 없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마음이 아프거나 힘들 때라면 어떨까요?
많은 직장인이 회사생활에서 겪는 업무 스트레스, 대인관계, 과도한 근무시간 등으로 인해 몸뿐만 아니라 마음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가벼운 정신적 피로감이나 무기력감이 찾아왔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좋아지기도 하죠. 하지만 이런 스트레스가 장기간 지속될 때는 번아웃과 직장,우울증, 불안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은 정신질환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의 병이 찾아왔을 때, 쉼이 필요함에도 대부분 직장인은 회사에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를 어려워합니다. 내면의 힘듦은 개인적 영역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극복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 말해 봤자 회사에 인정받기도 어렵고 괜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낙인이나 찍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한몫합니다.
과거에 비해서는 정신건강에 관한 관심과 인식, 관련 지식과 정보가 많이 대중화되었습니다. 정신과나 상담센터를 방문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에 관해서도 꼭 문제가 있거나 어딘가 이상한 사람들만 가는 것이라는 부정적 인식도 많이 줄어들었고, 누구나 힘들 때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회사에서는 정신건강 관련된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아마 회사가 언제나 성과를 내야 하는 곳, 끊임없이 평가받는 곳, 나의 쓸모와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곳이라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고 다른 사람들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내 장점은 부각하고 약점은 응당 감춰야 하는 법이죠. 그래야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런 분위기는 결근, 조퇴, 지각처럼 일터에 나타나지 않아 발생하는 손실을 의미하는 앱센티즘(absenteeism) 못지않게 큰 손실을 가져옵니다. 바로 프레젠티즘(presenteeism)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프레젠티즘은 몸은 회사에 있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의 저하로 인해 업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음의 병이 있어도 회사에 알리지 못하고 적절한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직원들은 아픔을 혼자 고스란히 감내하며 견디고 버티는 방식을 택합니다.
하지만 이런 버티기는 업무 집중력과 생산성 저하, 근로 의욕 감소라는 결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던 원래 의도와는 달리 어떤 방식으로든 결과적으로는 티가 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생산성 저하라는 표면적 현상 이면에 감춰진 정신적 어려움에 대해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나 상사, 사업주나 인사 담당자들은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저성과자’라고 치부하게 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하면 정신 건강상의 이유로 휴직이나 퇴직을 하기도 하는데요. 이는 조직 차원에서는 대체인력 선발 및 훈련에 따른 비용과 시간, 개인 차원에서는 경력단절 및 생계유지의 어려움이라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물론 요즘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사내 상담사 제도, 외부 전문기관을 통한 정신과 진료 또는 상담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기업이나 기관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위해서는 국가나 지방정부 차원에서 지원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런 노력은 조직의 생산성 향상과 개인의 정신건강 관리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도적 측면 못지않게 직장 내에서 정신질환에 관해 더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회사에서 정신과 진료나 상담을 지원해 준다고 하더라도, 관련 정보가 회사에 공유되어 관리 대상으로 분류되지 않을까, 인사발령에 불이익을 미치거나 권고사직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동료나 상사가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는 상황에서는 이런 정신건강 지원 서비스를 충분히 활용하기가 어렵습니다. 혹시 이용하더라도 자신의 현재 상태를 솔직하게 나누기보다는 괜찮다는 식으로 포장하거나 숨기는 경향을 보이기 쉽습니다.
따라서 이런 상담이나 정신과 진료에 관한 지원과 함께 조직 차원에서 정신건강에 관한 이해를 높이고, 부정적인 낙인이나 선입견을 갖지 않도록 리더십과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캠페인과 같은 다양한 방법을 병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신질환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본인 또는 주변 동료가 정신질환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어떤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은지에 배우고, 다양한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구성원들이 정신건강을 직장생활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영역으로 인식할 수 있게끔 도와야 합니다.
또, 정신질환이 소수의 특정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소외되거나 고립되지 않으리라는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을 심어줘야 합니다. 내가 겪는 마음의 어려움이 누군가에게 가십거리나 낙인이 되지 않으리라는 믿음, 힘들 때 주변의 동료와 상사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회사에서 굳이 힘들게 감추고 혼자 끙끙 앓기를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의 병, 회사에서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아마 거의 대다수 직장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정신건강과 정신질환에 대해 조금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변화를 만들어 가보면 어떨까요? 모든 사람에게 내 마음의 어려움을 다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믿고 의지할 수 있을 만한 직장 동료나 상사에게 필요한 도움을 요청해보는 연습, 혹은 반대로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들을 귀를 열어주고 손을 내밀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합정꿈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장승용 원장
[참고문헌] 1. The Silence Surrounding Mental Illness at Work. (2023, December 23). Psychology Today. https:/www.psychologytoday.com/us/blog/crazy-for-life/202312/the-silence-surrounding-mental-illness-at-work
2. 조진서. (2016). 쉬쉬! 정신진활 감추고 출근하는 한국. 자연스러운 ‘멘탈문화’를 만들자. 동아비즈니스리뷰, 214(1). https://dbr.donga.com/article/view/1203/article_no/7884/ac/magazine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한국정신분석학회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Master class 수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