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삼성 마음숲 정신과, 김재옥 전문의]
가족이라는 정글 속 등불 - 취향
수풀이 우거진 정글, 귀여운 초식 동물이 물을 마시고 있습니다. 평화는 잠시, 깊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 포식자가 달려들어, 이리저리 도망치는 초식동물을 사냥해 버립니다. 정글은 잠시 소란했다가 다시 깊은 침묵에 잠깁니다.
이런 약육강식의 생태계는 정글뿐만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기분이 좋지 않아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고, 어머니는 가족 중 가장 약자인 자녀에게 짜증을 내는 패턴은 어릴 때도 쉽게 눈치챌 수 있고, 그래서 자녀는 아버지 기분이 좋지 않으면 먼저 조심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직접 힘들게 하지는 않지만, 그 영향이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집안의 강자들은 약자를 장기 말처럼 활용하기도 합니다. 다른 강자의 기분을 확인하기 위해 자녀를 보내 떠보거나, 여기서 더 나아가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자녀에게 지시를 하기도 합니다. 물론 기분을 좋게 하는데 실패한다면 약자는 양쪽에서 공격받습니다.
부모님이 다툰 뒤, “네 아빠 밥 먹는지 물어보고 와라”라는 말이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상대방을 화해의 테이블로 불러들이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부 갈등의 해결을 위해 자녀에게 위험을 전가하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자녀 역시 이런 부담을 느끼기에 편하게 이 요청을 전달할 수 없으며, 이 불편함은 그대로 아버지에게 전달되어 화가 터지게 되죠. “안 먹는다고 해!”하면서요.
가끔은 부부 사이의 평화를 위해 자녀를 희생시키기도 합니다. 배우자의 외도나 섹스리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자녀의 교육이라는 공공의 적을 만들어 부부 사이의 문제를 외면합니다. 부부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자녀에 집중을 하는 것이기에, 자녀의 의견이 개입될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자녀를 배우자 대용의 가치를 지닌, 의존과 분노 표출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강자들이 자신의 생존을 결정하기 때문에 약자인 자녀는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합니다. 보통 어느 정도 눈치를 보며 강자의 충신이 되려 노력합니다. 메신저로서, 강자의 기분을 풀기 위한 희극인으로서, 집안의 평화를 위한 균형추로서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렇게 강자가 자신에게 부여한, 또 자신 스스로가 생존을 위해 부여한 역할들을 훌륭히 수행하다 보면, 서서히 자신의 존재에 대한 중요한 것들을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그중 하나가 취향입니다.
취향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시도해 볼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만 생겨나며, 생존에는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좋아하는 간식이나 취미 같은 사소한 것들부터 서서히 잃어가고, 종국에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같은 중요한 것들을 잃게 됩니다. 취향은 내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기준이 있어야 취향이 존재하기 때문에, 취향이 없다는 의미는 스스로 기준을 설정하는데 취약하다는 의미입니다. 내 기준이 없기에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며, 내가 선택하지 못함에 대해 괜히 다른 사람의 탓을 하며 화를 내기도 합니다. 사실 타인은 별 생각이 없는데도 말이죠.
가족이라는 정글 속에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변화합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종종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 내 의도와 상관없이 소중한 가족의 무언가를 잃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취향을 알아가고 응원하는 과정을 통해, 독립적인 개인으로서의 가치를 회복하고, 이를 통해 약육강식의 원리가 아닌 존중과 배려의 가족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취향이라는 등불을 통해, 정글 속 길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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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경험까지 알려주셔서 더 와닿아요. 재옥쌤 짱!"
"정말 도움됩니다. 조언 들으며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