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한명훈 광화문 숲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상처 받는 일이 있으면 보통 회피하는 편이에요. 그 일은 생각하지 않고 멍하게 웃을 수 있는 영상을 본다거나 잔다거나 단순 반복 게임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러면 금방 멀쩡해져요. 울 필요도 없고 감정 소모도 없고 깔끔해요. 그 일을 떠올리지만 않으면요.
그런데 이렇게 피하다 보니까 또 비슷한 일로 다시 상처를 받으면 내성이 생기는 게 아니라 더 크게 상처를 받는 것 같아요. 전에는 10만큼 상처를 받아야 아팠는데 이젠 8, 7 점점 작게 상처를 받아도 아파요. 별 것 아닌 일에도 상처를 받아요.
그래서 내성을 길러보겠다고 피하던 기억을 떠올리고 울어보기도 했는데 그건 길어질수록 ‘내 잘못이다.’ ‘그 사람에게선 넌 사랑받지 못한다.’라는 식으로 자존감이 깎이더라고요. 한번 울고 나서 다시 그 기억을 떠올려도 계속 눈물이 나고요. 몇 번이고 반복해서라도 엉엉 울고 터는 게 맞는 걸까요? 아니면 그냥 떠올리지 않고 묻어두다가 기억에서 사라지도록 기다리는 게 맞는 걸까요? 아니면 상처 극복에 다른 어떤 방법이 좋은 걸까요?
답변)
상처 받았던 과거의 기억들로 인해 괴롭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을 하고 계시는군요. 지난 일이 그저 과거의 시간 속으로 잊히고 흩어지면 좋겠지만 마음처럼 그렇게 되지 않아 속상하실 것 같습니다. 실제로 기억이라는 것은 참 야속하게도 좋았던 기억보다는 힘든 기억들이 더 잘 자리 잡고, 잊히기보다는 문득문득 떠올라서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좋은 경험들은 위험이 되지 않기에 잘 남지 않지만, 슬프거나 괴로운 경험은 우리의 생존에 위협이 되기에 다음번에는 더 잘 대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억에 잘 남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억들은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아 평상시에는 떠오르지 않아 없어졌나 싶기도 하지만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다행히도 이러한 기억들을 처리하고 해소해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때그때 그러한 상황에 들었던 '생각'과 '감정'들을 인지하고 말로 풀어낸다면 쌓이기 전에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기 어렵기 때문에 회피하거나, 투사하거나, 전치하는 방법으로 우회하여 해소하는 것을 시도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라도 이런 마음, 생각, 감정들을 풀어내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그렇기가 쉽지가 않지요.
질문자님께서 경험하셨듯 내 탓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나는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자존감이 깎여서 괴로운 시간을 경험합니다. 상처는 혼자 받는 것이 아니기에 혼자 힘으로는 이를 다루고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람 간에 상처를 받았기에 또 상처를 받게 되지는 않을까 도움을 요청하기 망설여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이를 혼자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괴로워하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나아지려고 하는 시도가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아질 수 있을까요.
1.
어떠한 관계와 상황 속에서의 경험은 생각, 감정과 연결되어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이 됩니다. 따라서 이런 '생각'과 '감정'을 다루어주고 풀어내 준다면 조금이나마 무의식에 있는 상처와 기억들을 어루만져줄 수 있을 것입니다.
2.
하지만 '감정'은 혼자 해소하고 위로받기가 어렵기 때문에 주변 사람의 공감과 지지를 통해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변의 섣부른 공감과 충고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 전문가의 도움을 요청하시고 구하시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심리 상담센터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의 거리가 많이 가까워졌기에 찾아가 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3.
어느 정도 감정이 해소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면 다음은 '생각'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겠습니다. 인지적인 접근 방법으로, 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면 이런 생각에 대해 '정확한 사고'를 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흔히 부정적이고 우울한 생각을 하게 될 때, 그런 생각을 하지 않거나 아주 긍정적인 사고로 지우려고 시도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냐 그렇지 않아', '다 괜찮아질 거야' 등등. 하지만 한쪽으로 잡아당긴 끈을 반대로 다시 잡아당기는 것은 그다지 효과가 있지 않답니다.
그보다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라는 생각이 좀 더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다.
모든 게 내 탓이고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을 때, 100%는 아닌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그마한 위로가 되어줍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느낌이 너무도 크게 다가올 때 우리는 이런 생각과 감정에 '매몰'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나씩 늘려서 생각의 기울어진 천칭을 중간에 가깝게 돌려놓는다면 이전과는 그래도 조금은 다르게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 다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상처는 혼자 받는 것이 아니기에 혼자 힘으로는 이를 다루고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홀로 애쓰다 보면 다시 괴로운 방향으로 돌아가기 쉽고, 야속하게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므로, 주변 상담센터, 병원에서 전문가와의 동행을 통해 도움을 받으시기를 권유드립니다.
힘든 마음 가운데 볕이 들 날을 고대하며 바랍니다.
공주국립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한별,혜강병원 진료원장
서울병무청 정신건강의학과 제 1 병역판정전담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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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받은 것 같아요. 매번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민하던 문제가 풀린 것 같아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도 돌아보게 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