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장원의 ‘직장 남녀를 위한 오피스 119’ (30)
[정신의학신문 : 민트 정신과, 조장원 전문의]
백화나 과장은 지난해 이직을 했다. 익숙한 것과 결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몸에 익은 출퇴근길, 손에 익은 업무들, 눈에 밟히는 사람들, 뒤돌아서기 허전한 마음……. 그렇지만 이 모든 걸 포기하고 새로운 일터를 찾아 나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도저히 함께 일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업무상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옆 부서 팀장과의 오랜 갈등 때문이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사정도 해보고 자존심 꺾고 굽히고 들어간 적도 있지만, 매번 커다란 벽을 느껴야만 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회사를 옮겨야겠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직한 회사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최 차장 때문이다. 직속 상사인 그는 은근히 자신을 무시했다. 최근에는 다른 직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백 과장에게 망신을 주기도 했다. 조용히 불러서 말하거나 전화나 문자로 이야기해도 충분한 일을 가지고 꼭 대놓고 떠벌여 사람을 무안하게 만든다. 여자라고 자신을 업신여기거나 확실하게 눌러서 슬슬 기게 만들려는 수작처럼 보였다.
“도대체 번번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고요. 제발 그만 좀 하세요!”
마침내 오늘 폭발하고야 말았다. 별것 아닌 일로 짜증 내는 최 차장에게 백 과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대항했고, 자리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팀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음이 되었다.
그날 백 과장은 바로 부서 이동을 신청했다. 최 차장을 만나지 않고도 일할 수 있는 다른 부서로 옮겨달라고 회사에 정식 요청한 것이다.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른 직원과 마찰을 일으켜 부서 이동을 희망한다는 것은 분명 마이너스 요인이다. 회사에서 자신을 좋게 볼 리 없다.
하지만 이대로 참고 지낼 수는 없었다. 좋지 않은 평판이 생기고, 불이익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을 함부로 건드리거나 방해하지 않는 곳에서 제대로 한번 편안하게 일해보고 싶었다.
‘나는 왜 이렇게 가는 곳마다 이상한 사람을 만나 괴로운 걸까?’
눈을 감고 지난날을 찬찬히 돌이켜봤다. 어딜 가든 자신을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중고등학생 시절에도 바뀌는 반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안 맞아 티격태격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대학생 때도 매사 의견이 맞지 않아 불협화음을 내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 친구와는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졸업할 때까지 서먹서먹하게 지내곤 했다. 학교 친구니까 그러려니 했다. 사회에 나가 직장생활을 하면 조직문화가 있고 위계질서가 있으니 다르리라 생각했다. 잘 적응하고 어울려 멋진 성취를 얻고 싶었다. 노력도 했다. 그러나 번번이 가는 회사마다, 옮겨간 부서마다 자신을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앞으로 어떻게 회사생활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
이런 고민을 하는 직장인들이 의외로 많다. 가끔은 자신을 화나게 만드는 사람에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유독 열심히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문득 이런 분노가 내 힘의 원천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분노, 반성, 열심 또 분노, 반성, 열심……. 이런 생활의 반복 때문에 스트레스가 점점 쌓여간다. 왜 이러는 걸까?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분노는 필요한 감정이다. 상대방이 나를 침해할 때 분노를 느낀다. 만약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면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기가 어렵다. 내 감정, 신체, 재산 등을 지키기 위해서는 분노를 느껴야 한다. 분노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여겨 화를 표현하지 않으려 하거나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화를 너무 억압하면 한꺼번에 폭발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관계의 방향이 틀어지기도 한다. 화를 느끼지 않으려면 결국 상대방을 피하는 방법밖에 없다. 화를 느끼고 싶지 않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상대방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다. 화를 느끼지 않으려고 사람을 피하고 관계를 단절시킬 수는 없다.
화라는 감정은 뜨거운 감정이라서 내 마음에 오래도록 쥐고 있기 힘들다. 그래서 바로 상대방을 향해 던져버리기가 쉽다. 하지만 내 감정과 행동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미성숙한 방법으로 표출했다가는 나에게 피해가 올 수 있다. 상대방과 큰 다툼으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
그렇다면 화가 났을 때 이를 어떻게 표출하는 것이 성숙한 태도일까?
먼저 글로 써보는 게 좋다. 화가 났을 때 느꼈던 감정과 생각 그리고 지금 느끼는 내용까지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도 적는다. 나만 보는 거니까 거침없이 써 내려가도 괜찮다. 이를 통해 내 안에 있는 화를 확인하는 것이다. 화를 억압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다음은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단순히 저 사람이 나를 화나게 했다는 식의 해석이 아니라, 저 사람의 어떤 행동이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게 해서 화가 난 것인지를 분석해야 한다.
“최 차장 때문에 화가 났어.”
상황에 대한 이런 묘사를 다음과 같이 분석해 내는 것이다.
“최 차장이 사람들 앞에서 나를 비난했어. 나한테 뭐라고 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까지 그럴 건 없잖아? 이직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야. 안 그래도 다른 직원들이 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거 같아 신경 쓰였는데, 이 일로 은근히 나를 더 무시하지 않을까?”
세 번째는 분노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해보는 것이다. 원래 사이가 안 좋아서 더 화가 나는 건 아닌지 자세히 살펴본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있었던 분노가 함께 느껴지는 건 아닌지 혹은 과거 비슷한 관계에서 느꼈던 화가 느껴지는 건 아닌지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자칫하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격이 될 수도 있기에 이런 관계를 들여다봐야 한다.
이런 접근을 통해 감정을 수동적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느끼고 해석하려 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내 분노를 내가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다음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달한다. 화에 휘둘려서 있는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화를 정확히 느끼고 해석해서 상대방에게 제대로 들려주는 것이다.
“너 때문에 화났어. 네 잘못이야!”
이것은 감정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아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메시지는 상대방을 방어적으로 만들 수 있고, 내 의견에 대해 반박할 수 있게 한다.
“네 이러한 행동이 나에게 이렇게 느껴져서 내가 화가 났어.”
분명한 언어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해야 한다.
상대방의 의도는 잘 모른다는 걸 언급하는 것도 소통에 도움이 된다. 실제로 상대방의 의도를 내가 100% 알 수는 없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이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효과도 있다. 화를 표출할 때도 목적을 명확히 하는 게 좋다. 내가 이 사람하고 싸우려는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관계를 개선하려는 것인지 말이다. 이런 목적을 상대방에게 알리는 것도 괜찮다.
이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이 내 기대와 다를 수 있다. 내 감정이 내 것인 것처럼 상대방의 감정도 상대방의 것이다. 내가 좌지우지할 수 없다. 내가 내 감정을 처리하느라 시간을 가졌던 것처럼
상대방도 스스로 감정을 처리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한다. 기다리는 것이다.
화를 느끼는 상황 자체는 대부분 수동적이다. 이 같은 상황이 내가 느끼는 감정을 수동적으로 만들기 쉽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느낀 감정은 내 것이라는 데 유의해야 한다. 감정은 내 아이 같은 존재다. 미우나 좋으나 내 새끼다. 성장해서 내 손을 떠나면 그때부터 내 몫이 아니지만, 그전까지는 내 책임이다. 상대방에게 전달하기 전까지 내 감정을 잘 키워서 온전히 전달하고 나면 내 몫은 거기까지다. 이제는 상대방의 시간이다. 상대방이 추슬러서 반응할 감정을 기다려보자.
※ 본 기사에 등장하는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가공된 것으로 실제 사례가 아닙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나를 지키는 심리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