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강남 푸른 정신과, 신재현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평범한 여자입니다. 제 생활은 코로나로 인해 다 무너졌습니다. 일도 못 하게 되고 집에 있으면서 무기력해졌습니다. 단순히 무기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밥도 귀찮고 삶도 귀찮고 숨 쉬는 것도 다 지루하고 무의미합니다.     

원래의 성격은 쾌활하고 현실적인 편입니다. 사회에서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어울리고 처음 만난 사람도 낯가림 없이 잘 대합니다. 그렇지만 성격이 칼 같아서 호불호가 심합니다. 싫은 건 싫고 좋은 건 좋고 중간이 없는 게 문제라면 큰 문제입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힘들고 괴롭고 끔찍한 일들도 많이 겪어왔지만 잘 참고 잘 버텨냈었고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엄마랑 같이 사는 남자한테 4년을 맞을 때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악물고 울지도 않고 쓰러져도 기절해도 덤비고 또 맞아가며 사춘기 시절을 참고 버텼습니다. 일찍부터 사회생활하면서 이런저런 현실에 부딪혀 휘청거리고 너무 힘겨웠어도 잘 견뎠습니다. 사장도 팀장도 부장도 겁내지 않았었고 항상 당당하고 바른말 제대로 하는 그런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한 남자를 만난 뒤로 저는 스스로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밑으로 꺼져가고 있습니다. 너무 우울합니다.     

 

이 남자는 항상 저를 비난하고 비판하고 외면하고 회피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만 보입니다. 평소에는 상관없지만, 문제가 생겼을 시에는 항상 발을 빼고 뒷짐 지면서 저한테만 책임을 전가합니다. 처음에는 싸워댔지만 이젠 그조차도 지치고 기운 빠져서 피해버립니다. 그리고 나면 무섭도록 어둡고 고요한 우울감에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정말 내일 눈을 안 떴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 순간 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모순되는 행동만 하는 남자랑 대화만 해도 우울합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소통도 이해도 대화 자체도 안 됩니다. 그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 공허 상실감에 자꾸 꺼져만 갑니다. 매일 불면증에 시달리고 소화도 안 되고 머리는 계속 빠지고 엉망으로 변해가는 제모습도 너무 끔찍하고 싫습니다.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할까요? 무슨 조치를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사실 저도 이렇게 우울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답답하고 숨 막히고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사진_pexel
사진_pexel

 

답변)

 

안녕하세요, 강남푸른정신건강의학과 신재현입니다.     

질문자님의 글을 보며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학대의 경험, 또 그 학대의 경험을 다시 느끼게 만드는 상대와의 관계가 얼마나 힘들지 도저히 상상조차 되질 않네요. 끝없이 이어지는 어두운 터널을 걸어가는 느낌이 아닐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요. 부디 힘내시길 바랍니다.     

질문자님을 직접 대면하지 않아 많은 걸 파악할 순 없지만, 글 곳곳에서 질문자님의 우울감이 묻어나는 것 같아요.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잠이 오지 않고, 소화가 안 되는 증상들은 모두 우울증을 시사하는 소견입니다. 우울증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정신과를 방문하시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호한 두려움에 염려만 하기보다, 좀 더 정확한 문제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면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알 수 있고, 두려움도 줄어들 수 있으니까요.     

또 우울증은 저마다 다른 모습을 지녀요. 우울증이 걸린 이의 수만큼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우울증의 기원, 경과, 또 극복하는 과정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천편일률적인 극복 지침을 따르기보다, 자신에 맞는 방법들을 치료자와 함께 고민해나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겁니다.     

 

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질문자님의 우울증은 과거의 맥락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이 커 보여요. 성장과정에서의 학대 경험과, 헤아려지지 못한 두려움과 분노가 마음속 상처로 남았을 겁니다. 마음 깊은 곳에 숨은 트라우마는 현재 생활에서 마주치는 작은 자극으로도 과거의 끔찍한 경험을 불러일으킵니다. 지금 만나는 상대는 과거의 두려움을 지금 이 순간 경험하게 하는 촉발 요인 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을 짓밟고, 상처 주는 학대자처럼요. 스트레스 요인이 명확하다면, 그 스트레스 요인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합니다. 나를 상처 주고, 또 과거의 상처까지 드러내게 하는 상대라면 먼저 감정적인 거리를 두거나, 할 수 있다면 물리적인 분리를 고려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살펴야 합니다. 내가 왜 상처 주는 사람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지를요. 자신에게 상처가 될 것이 뻔한 자기 파괴적인 관계에 집착하게 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마다 이유는 다를 겁니다. 상처를 입는 것보다 헤어지는 경험이 더욱 두렵거나, 가학-피학적인 관계 패턴이 자신에게 익숙한 탓일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관계 패턴을 살피는 일도 도움이 됩니다. 나를 스쳐간 연애사를 두루 살피면 자신이 경험하는 관계의 취약성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내가 왜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매여있는지에 대한 해답이 보이게 될 테고요.     

또, 과거의 감정에 대한 정리도 필요합니다. 과거에 내가 경험했던 학대의 경험에서 자신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어떤 감정이 응어리져 있는지, 또 그 감정이 내 삶에 던진 메시지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는 열쇠가 될 수 있어요. 나를 잘 이해하는 치료자와 이러한 문제들을 함께 나누며 이해받고, 또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해나갈 수 있다면 질문자님의 오랜 상처와 지금의 우울증은 조금씩 나아질 수 있을 겁니다.     

부디 도움이 됐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  *
 

정신의학신문 마음건강검사를 받아보세요.
(상담 비용 50% 지원 및 검사 결과지 제공)
▶ 자세히보기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푸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나를 살피는 기술>, <어른의 태도>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선생님을 만나고나서 분노를 좀더 잘 다루게 된 것 같아요"
    "신재현 선생님의 따뜻한 조언에 살아갈 용기를 얻었어요"
    "지방이라 멀어서 못 가지만 여건이 되면 찾아가고픈 제 마음속의 주치의입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