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에 대한 짧은 생각

사진 픽사베이

가족들이 시골 어느 집에 모두 모여 한 노인의 곁에 둘러 앉아있다. 앉지 못한 몇몇 남자들과 아이들은 서 있기도 하다. 얼마 뒤 흐느끼는 이도 있고, 울음을 겨우겨우 삼켜가는 이도 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몇 해전 있었던 필자 외증조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최근에 볼 수 있는 임종의 흔한 모습은 아니다. 최근에 친지나 가족의 임종을 경험한 적이 있는 이라면, 고인의 마지막 모습은 대개 병원에서, 또 많은 경우 몸에 연결된 개수를 바로 가늠할 수 없는 양의 수액 및 약물의 투약라인, 의료기기의 선들, 인공호흡을 위한 기관 삽관 튜브, 환자의 몸보다 더 큰 인공호흡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학 연명치료의 끝에서 볼 수 있는 임종의 흔한 모습이다.

과연 이런 모습들이 바람직하고, 환자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는 모습일지는 의문이 든다. 최근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산하의 EIU라는 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죽음의 질’은 세계 18위, 아시아에서 4위이다. 죽음의 질 지수는 임종 환자의 통증을 덜어주고, 가족이 심리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평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죽음을 앞두고 방문할 수 있는 병원 수, 치료의 수준, 임종과 관련한 국가 지원, 의료진 수, 비용 부담 항목 등 20가지 지표를 합산해 순위를 매긴다. 물론 5년전의 30위에서 12계단이나 오른 수치이다. 하지만 이 향상의 주요 요인은 ‘치료 수준’의 상승이다.

지난 세월 동안 한국 현대의학은 많은 발전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는 질환들이 많고, 노화를 거스를 수는 없다. 누구나 언젠간 ‘죽음’이라는 상황을 맞이 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맞이할 죽음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최근 여러 사람들이 ‘존엄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끝까지 아름답고 고귀하게 또 사람답게, 표현이 잘 맞을지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임종’을 원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호스피스에 대한 관심도 많이 높아졌고 실제 호스피스 병동을 가지고 있는 종합병원들도 많이 생겨났다.

최근 정상적인 판단이 가능한 시기에 만약의 상황에 대해, 연명치료 거부에 대한 의사를 명확히 밝히고 고지하는 경우도 있고, 또 병원에서도 의학적인 신중한 판단 후 회복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예를 들자면 말기 암 환자들과 같은 경우에 갑작스러운 악화 상황 등에서 심폐 소생술, 기관 삽관 등의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환자 및 보호자들과 상의하고 그에 대한 동의를 받아 연명치료를 시행하지 않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다. 이를 의료인 사이에서는 ‘DNAR (Do not attempt resuscitation) 동의’라 부른다.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으나, 절대 그렇지 않다. 영문 해석 그대로 의학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갑작스런 환자 상태 변화 시 단순 연명치료를 위한 기관 삽관, 심폐소생술 등만 시행하지 않는 것이다.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각종 연명치료를 시행하여 짧게는 수일, 길게는 수개월을 더 살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의식도 없이 각종 기계와 약물의 힘을 빌어 목숨만 더 부지하는 것이, 과연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환자가 진정 원하던 그런 마지막 모습이며, 존엄한 모습일지에 대한 고민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관련된 사람들의 가치관, 가족역동, 기타 사회적 환경에 따라 이에 대한 견해도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답이 있는 고민은 아니나 늘 논의되고 있는 문제이다. 나의 마지막, 또는 내가 사랑하는 어떤 이의 마지막의 어떤 모습이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고 행복할 지 한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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