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픽사베이

 

퇴근할 수 있는 권리?

 

오랜만에 야근이 없는 날, 김대리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근 몇 달만에 정시 퇴근했다. 한창 열중하던 프로젝트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막을 내렸다. 여유롭게 인근 카페에서 커피를 사고, 여자친구와의 약속장소로 발걸음도 가볍게 향하던 중 들리는 불길한 소리.

 

‘카톡, 카톡, 카톡, 카톡…’

 

퇴근 후 채 몇 십분이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의 메신저 알림음이 연달아 울리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회사 부서의 단체방에서 올라오는 메시지였다.

 

“O과장은 업무 변동사항 어서 확인하고, O대리는 확인한 내용 어서 서면 보고 올리도록 하게.”

 

바쁘게 돌아가는 단체방의 메시지들을 보며, 김대리는 먹던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퇴근 후 이어지는 업무 메시지로 인해 한순간에, 김대리가 서 있던 곳은 여자친구와의 즐거운 데이트 현장이 아닌, 온몸과 마음을 긴장시키는 업무현장이 되어버렸다. 김대리의 머릿속은 데이트를 빨리 끝내고 해야 할 업무들과 불쾌감, 불안과 긴장 등으로 뒤엉켜버렸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던 순간이었다.

 

비단 김대리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1245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97%가 시와 때를 가리지 않는 업무 관련 메시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다(참고-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 이들 중 84%는 퇴근 이후 업무 관련 메시지를 받아본 적이 있다고 했고, 메시지를 보내는 상대는 대개 직속 상사였다. 메시지의 절반 이상은 추가적 업무를 위한 지시였다고 한다(54.6%). 이처럼, 대다수의 직장인은 퇴근 이후에도 업무를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저녁이 있는 삶으로 돌아가겠다.”  

 

예전 한 정치인이 정계를 은퇴하면서 했던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던 적이 있다. ‘저녁’이라는 단어 안에는 휴식, 편안함, 재충전, 가족과의 삶과 같은 삶의 질과 관련된 많은 개념이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당신의 삶에는 ‘저녁’의 아늑함, 포근함이 있는가? 몸은 직장을 떠나 있어도, 마음은 아직 직장에서 온전하게 퇴근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사진_픽사베이

 

나는 지금, 여기 있는가?

 

tvN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꽃보다 할배>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노년기에 접어든 대선배들을 모시고 연기자 이서진 씨가 길을 안내하고 있다. 여행을 자주 갈 기회가 없었던 ‘할배’들은 스케줄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한가롭게 여행을 즐긴다. 다리가 아프면 잠시 아무데나 앉아 바람을 쐬고, 또 주변의 풍광들을 보며 한 마디씩 거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서진 씨의 모습은 이런 할배들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는 어려운 대선배들을 모시고 혹시나 헛걸음을 하게 될까, 불편하게 하지는 않을까 여행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화면 속의 이서진 씨는 항상 머릿속이 꽤나 복잡한 모습이다. 그의 마음은, 지금 현재의 여행을 전혀 즐기지 못하고 있다.

 

퇴근 시간이 지나도 업무 메시지에 시달리는 직장인의 모습이, 화면 속의 이서진 씨의 모습과 일견 비슷해 보인다. 물리적인 퇴근 시간은 이미 지나 몸은 직장을 떠나 있지만 메신저에서 울리는 업무 관련 메시지들은 직장인들을 결코 직장에서 ‘온전하게’ 놓아주지 않는다. 퇴근하지 못하는 삶은 과한 부작용을 낳는다.

 

인간의 몸은 자극이 주어지면 체내의 자율신경계 중 하나인 교감신경계가 에너지를 만들고, 여러 기관을 각성시킨다. 주의집중을 높여 일 처리를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은 분명 한계가 있다. 에너지가 어느 정도 분출되고 나면, 에너지를 쌓고 흥분을 가라앉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몸은 자연스럽게 부교감신경계를 활성화해 각성과 흥분을 가라앉히는 시간을 가진다. 이렇듯 인간의 몸은 절묘하게 각성, 흥분과 진정, 휴식의 균형을 잘 맞추어 나간다.

 

하지만, 퇴근 후에도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업무들로 인한 각성은 우리 몸과 마음을 균형을 깨뜨린다. 또한, 실제 업무를 하지 않더라도 업무 시의 스트레스를 연상시키는 메시지들 또한 같은 효과를 야기한다. 몸은 퇴근 후 밖에 있지만, 마음은 업무 현장에서 일을하고 있는 것과 같다. 지속되는 교감신경계의 활성은 고혈압, 심장병, 뇌혈관 질환, 불면증 등과 같은 신체와 마음의 여러 질환을 만들어낸다. 점차 증가하는 성인병, 우울증, 불면증 등의 비율과 현대인의 바쁜 삶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과거와는 분위기가 바뀌어 사내 조직문화, 회식 문화 등이 개선되어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고도성장기에 회사에 중요한 덕목이었던 필요 이상의 성실함과 업무에의 충성 같은 찌꺼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 최근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해외여행을 핑계로 휴가 기간 동안 휴대전화의 전원을 꺼 놓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 안타깝게 들린다.

 

사진_픽사베이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의 중요성

 

현대 정신의학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가 ‘마음챙김(mindfulness)’이다. 동양의 선, 요가, 명상 등을 서양의 정신의학에 도입하여, 스트레스 관리, 불안장애, 우울증 등 여러 정신과적 문제들의 치유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이 확인했다. 마음챙김에서는, 현재의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한 기법들을 가르치며, 이로 인해 삶의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하도록 한다.

 

마음챙김에서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지금, 현재, 여기에 존재하여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다. 사회의 변화가 빨라지고, 복잡해질 수록 우리는 현재 이 순간에 닻을 내리지 못하고 과거의 문제들이나, 미래에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것들에 마음을 뺏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지금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한다.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스트레스의 근원은 이 지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발전한 문명의 이기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삶을 확장하고 연결하지만, 업무와 ‘내 삶’의 불분명한 경계는 퇴근 후의 휴식을 없애고 계속되는 스트레스를 유발하기 마련이다.

 

우리에게도 ‘저녁이 있는 삶’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짧은 기간 눈부신 성장과 변화를 겪어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섰지만, 직장을 비롯한 조직 내에서는 아직 삶과 직장의 경계에 대한 인식이 모호하다. ‘일이 있으면 시간을 막론하고 처리를 해야 한다’ 는 사고가 팽배해 있으며, 이로 인해 직장인들의 삶이 유린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휴식과 퇴근이 보장된 조직의 업무 효율이 높다는 연구가 속속 발표되고 있으며 긴 업무시간이 업무 생산성을 증가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검증된 명제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사회적인 인식과 구조의 변화가 최우선일 것이다. 국내에서도 정부의 주도로 ‘퇴근 후 업무 카카오톡 금지법’을 추진했던 것처럼, 퇴근 후의 삶을 가지기 위한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이는 직장인들뿐만이 아닌 국민 전체의 행복과 삶의 질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개인이 가진 업무와 휴식에 대한 인식의 변화 또한 동반되어야 한다. 업무를 할 때면 스케줄링을 비롯한 업무 효율성을 높일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업무와 자신을 동일시하기보다는, 건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여러 방법의 하나로 여기는 인식도 중요하다.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는 자신이 만들어 낸 자기인식에 기인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휴식할 때면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독서 혹은 음악감상이든, 커뮤니티 활동이든 현재,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게 몰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든 도움이 된다. 물론, 개인의 노력으로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기는 힘들 수 있다. 부디, 사회적인 인식의 변화와 개인의 노력이 조화를 이루어 우리의 삶이 저녁을 온전히 되찾게 되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