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웃음기가 사라질, 오르막길 앞에서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 두자. 오랫동안 못 볼지 몰라’

윤종신과 정인이 함께 부른, ‘오르막길’ 이라는 노래의 도입부이다. 이 노래처럼 결혼 이후 부부가 만나게 될 여정을 잘 표현한 가사가 또 있을까.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열린 성대하고 화려한 결혼식과, 즐거웠던 허니문의 짜릿한 기억은 행복하고도 평온한, 그림 같은 결혼 생활을 꿈꾸게 한다. 하지만 삶은 현실이다. 독립된 개인들이 만나, 가정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함께 생활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평탄한 길을 걸어가던 이들이, 마침내 오르막길을 접하게 되는 순간과 같다. 이미 결혼생활을 경험한 인생 선배들이 결혼을 앞둔 연인들에게 던지는 짓궂은 농담처럼, 결혼은 과연 ‘굳이 고생을 사서 하는’걸까?

 

사진_픽사베이

 

사랑의 뇌과학

인간의 뇌에는 사랑의 감정과 관련된 많은 호르몬이 있다. 대표적으로 도파민은 인간의 목적 지향적인 행동(goal-directed behavior)에 연관된 호르몬이며, 사랑에 빠진 이에게서 보이는 맹목적인 사랑의 추종, 중독에 가까운 몰입을 야기한다. 노르에피네프린은 노르아드레날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신체와 감정의 흥분에 관여한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의 긴장감처럼,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신체적, 감정적으로 고조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처럼 연인들의 사랑이 깊어가는 과정에서,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옥시토신과 같은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들이 분출되기 시작하며 몸과 마음을 사랑에 가장 잘 반응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사랑의 상태가,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이러한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들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사랑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평생의 언약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언약과 동시에 ‘사랑의 마법’은 그 힘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물론 개인차는 있지만, 삶에서 만나게 될 수밖에 없는 많은 갈등도 변화에 한 몫을 한다.

 

부부관계 - 사랑과 우정 사이 ?

그렇다면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중년 부부의 모습은 과연 허상일까?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 서로를 극진히 위하고 배려하며, 사랑을 주고 받는 중년 부부의 행태의 기저에 있는 감정은 첫 출발 시의 감정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출발선에서의 감정이 직선적이고 뜨거워 쉽게 다룰 수 없는 형태라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의 감정에서는 그러한 뜨거움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함께 헤쳐나가는 삶의 물결에 부드럽게 풍화되어 깎여나간, 크기는 작지만 또렷하고 명확한 형태일 것이다. 뜨거운 사랑이 차지하는 부분이 줄어들면서, 사랑이 깎여나간 자리를 채우는 것은 우정(friendship)혹은 동지애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부부로서의 인연이 깊어져 가면서, 사랑과 더불어 삶의 풍파를 함께 겪으며 점차 부부 사이에 일종의 ‘우정’도 함께 자라난다. 금실 좋은 중년 부부의 마음 안에는 ‘사랑과 우정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할 감정들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진_픽사베이

 

부부 관계는 은행 계좌와 같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서로의 행동이 그저 귀엽고 예쁘기만 하다. 서로에게 하는 잘못과 실수도 너그러이 용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 품이 넓어진다. 하지만, 절정에서 점차 줄어드는 사랑의 감정은, 그러한 포용력마저 줄인다. ‘결혼이란 권리를 반으로 줄이고, 의무를 두 배로 늘리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자신의 주장을 줄이고 타인을 배려해야 하는 상황의 반복을 견디기 힘들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성격과 생활 패턴, 삶의 역사가 완전 다른 개인들이 만나자마자 조화를 이루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또한 ‘집안 대 집안의 만남’이라는 한국 전통의 결혼에 대한 관념은, ‘시월드’와 ‘장서갈등’에 대한 부담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삶에서 만나게 되는 돌발적인 이벤트들이 늘어난다. 점차 배우자 간에 갈등의 소지 또한 삶의 전면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부부 관계를 잘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부부 관계는 은행 계좌와 같다. 아직은 많은 갈등을 마주하기 전, 긍정적이고 행복했던 기억과 관계들을 ‘저축’해야 한다. 저축한다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행복했던 때가 각인될 수 있도록 당시의 순간을 충분히 누리고 즐겨야 한다는 말이다. 여정을 함께 헤쳐갈 파트너와의 즐거웠던 기억은 힘든 일들이 끊임없이 나타날 때 견딜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배우자와의 기억과 그 순간의 행복하고 즐거웠던 감정들은, 오르막을 오르기 위해 잠시 숨을 가다듬는 평지에서의 베이스캠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갈등에서도, 상대와의 건강했던 관계의 기억을 조금씩 인출해 보자. 갈등에 가려져 있던 상대방의 입장이 이해되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꽉 차 있던 감정의 압력도 낮아지기 시작한다. 즉, 공감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건강했던 관계의 기억을 인출하여 잠시 상대에게 빌려주는 셈이다.

물론 몇 번의 시도만으로 잘 안 된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도 없다. 관계의 기술에 정답은 없으니까. 하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와 사랑에 노력이 뒤따른다면, 분명 처음의 뜨거웠던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서 평화로운 풍화작용을 거쳐 작지만 아름다운 관계의 결정체를 남길 것이다.

 

사진_픽셀

 

결혼 생활은 핑크빛이 아닌, 투명한 무(無)색

사랑, 연애, 결혼…. 많은 이들은 이러한 관계를 ‘핑크빛’이라 표현한다. 하지만, 상대에게 좋은 부분만을 보여주고 싶은 연애 시기와는 다르게,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험난한 오르막을 올라가야 하는 결혼 생활을 그저 핑크빛으로 착각하며 살 수 있을까? 차라리, 섣부른 기대도 지나친 비관도 없이 담담하게 서로를 토닥여주며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결혼 생활은 투명한 무(無)색에 가까울 것이다.

험난한 길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배우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의 태도를 가지고 조금씩 노력해 나아간다면, ‘오르막길’의 가사처럼, 결국 삶의 한 지점에서는 온건하게 사랑을 외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사랑’은 감정이 아니랍니다, 정재승, 한겨레 21, 2007 제690호 칼럼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160000/2007/12/0211600002007122006900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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