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정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11월 15일 포항에서 발생한 5.4 규모의 지진은 천여 명의 이재민과 수백억의 피해액을 기록하고 있고, 추가적인 재난 가능성마저 예견되고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적절한 초기 대응만큼은, 세월호 사건 당시 정부의 대응과 비교되며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큰 재난은 인간에게 경제적, 신체적, 정신적으로 다양한 정도의 손실을 준다. 이 각기 다른 손실들은 그 특성이 모두 다른데, 그 중 정신적 손실을 일컫는 ‘트라우마’의 특성은, 오랜 기간 손상이 지속될 뿐 아니라, 심지어 악화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해상 사고를 겪은 사람이 처음에는 바다에 가는 것을 두려워 하다가, 그 이후에는 강에 가는 것도 두렵게 되고, 심지어 비가 오는 날에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불안과 두려움은 한 사람의 정신세계를 서서히 잠식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큰 재난은 한 개인의 기억에 강력하게 각인되며, 그 각인이 정신적 불안, 공포, 신체적 증상으로 발현되며 끊임없이 인생을 잠식해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재난에 의한 트라우마를 다루는 것은, 몇 년 이상의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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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문재인 정부의 적절한 초기 대응에 비해서 후속 대처들은 이전 정부의 대응을 답보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세월호 사건 당시 정부의 현장 심리지원은 약 반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세월호 특별법으로 사건 발생 이후 1년은 약물 등 의료지원을 했으며, 5년은 심리지원을 지속하고 있다. 당시 현장 심리지원은 다양한 부처, 지자체에서 각자 운영했고, 그렇기에 비효율적인 면이 있었다. 비슷한 서비스를 상호 협의 없이 각자 제공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장 심리지원을 중단하는 시점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비효율성이 더 커지게 되었다. 현장 심리지원을 나가는 의료진은 대부분 타 지역 정신건강센터나 국립정신병원 소속이다. 지원 의료진이 현장에 나가게 되면, 기존 업무는 남아있는 사람들이 분담하게 된다. 단기간의 지원은 이런 분담으로 인한 부담이 덜하다.

 

사진_픽사베이

 

하지만 장기간의, 기간이 명시되지 않은 형태의 지원은 해당 기관의 업무 부담을 증가시킨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정신건강센터나 국립정신병원은 열악한 급여와 근무환경으로 인해 인력이 늘 충분하지 않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13년 기준으로 인구 10만명당 정신보건인력이 영국 318.9명, 미국 125.2명이지만, 한국은 42.0명에 불과하며, 정신보건전문요원의 73.6%가 1년 단기 계약직이다. 따라서 재난 발생 시 현장 의료지원을 나가게 되면, 오히려 해당 정신건강증진시설이 담당하고 있는 지역의 심리지원 역량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결국 재난 지역은 비효율적인 과도한 심리지원을 받게 되고, 재난 외 지역은 심리지원에 공백이 생기는 이상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또한 과도한 업무 부담은 현재도 평균 2.7년 밖에 안되는 평균 재직기간을 더 단축시켜, 보다 장기적인 심리지원 역량이 쌓이는데 악영향을 준다. 법적으로 재난 심리 지원을 5년간 해야 하는데, 정작 정신보건전문요원의 평균 재직기간이 그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면, 지원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사진_픽사베이

 

따라서 재난의 정도에 따른 단기 심리지원의 양과 기간을 결정하고, 장기적인 심리 지원을 관리할 수 있는 체계가 모두 필요하다. 이런 필요성에 힘입어 ‘국립 트라우마 센터’에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서울시는 내년 3월 ‘트라우마 아카데미’ 사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정신건강 전문가의 의견과 실제 현장의 목소리 모두를 잘 반영하는 트라우마 센터가 설립되어, 이번 정부의 적절한 재난 대응이 앞으로 체계화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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