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윤희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R씨의 사연

 

사람들은 저를 보면 어떤 때는 자존감이 높다고 할 때도 있고 낮다고 할 때도 있어서 저를 가늠하지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대학교 휴학 전까지는 밝고 긍정적이고 예쁨 받던 학생이었는데, 휴학하고 알바하던 곳에서 안 좋은 일이 많이 있어서 힘들었었고요, 그때부터 우울증이 생겨 5년 정도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뒤로 연애를 했는데, 연애하면서 좋아하는 일도 할 때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신나고 행복하게 살다가, 최근에 4년간 사귄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우면서 파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어김없이라는 표현도 마음이 아픈데요, 자존감이 낮아지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남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면서 힘들어집니다. 최근에 새로 취업도 해서 집중해서 일을 해야 하는데, 하루 종일 24시간 내내 전 남친 생각이 납니다. 온갖 부러움 다 받으면서 연애를 했는데 이렇게 끝이나니 너무 힘드네요. 온갖 나쁜 거짓말을 하면서 헤어졌는데도, 그 남자가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얘기도 들었는데도, 그간 힘들었다는 남자의 한 마디 말로 ‘잘 가라, 너는 조금만 솔직해지면 더 행복할거다’라며 보내줬는데, 결국 알고 보니 그간 거짓말을 했던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분노가 쌓이고, 욕 한번, 따귀 한 번 못 때려준 것 때문에 너무 힘이 드네요.

 

사진_픽사베이

 

특히 저를 힘들게 하는 것은, 제가 이겨내는 과정에서 마음이 비뚤어졌는지 자꾸 그 바람난 여자 상대를 생각하고 저와 비교를 하게 되네요. 저는 수수하고 통통한 스타일인데 걔는 화장도 잘 하고 옷도 잘 입고 키도 크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되고요. 일을 하면서 나름 잘 하고 있는데도 계속 긴장하면서 ‘그 여자라면 이런 때 나보다 더 잘 했을 거다, 여기 사람들도 걔를 더 좋아했을 거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저는 인성도 빠지지 않고, 친구도 많고, 학력도 좋고, 여러 언어도 할 줄 알아서 부러움도 사고, 최근에 취업도 두 군데가 되어서 그 중에서 골라서 들어간 것인데요, 다른 사람들이 축하하고 부러워하는데도 감흥이 안 들더라고요.

 

예전에 심리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저는 칭찬이나 긍정적인 이야기는 안 듣고, 부정적이고 질책하는 것만 크게 받아들인다고 하더라고요. 자존감이 없어서인지, 상대가 너무 좋아서인지 저는 끝까지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며 붙잡으려고 하는데, 저도 이제는 이게 아니라는 거를 아는데도 마음이 정리가 안되요. 이것 또한 제가 자존감이 없나 싶기도 하고요. 그렇게 모질게 했는데도 왜 아직도 좋아하는지. 그런데 제가 답답한 마음에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다가 제가 아주 예전에 연애할 때 올렸던 글을 봤는데 그때도 자존감이 엄청 낮았더라고요. 제 자존감을 위해서 도움을 받고 싶은데,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지내려면 어떻게 할지 부탁드립니다.

 

사진_픽셀

 

뇌부자들의 답장

 

R님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메일을 읽으면서, 최근에 이별을 겪고 자존감에 상처를 크게 입으신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보통의 이별이 아니라 남자친구의 바람으로 파혼을 하게 되었으니 정말 큰 충격을 받으셨을 것 같고, 혼란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이 상황을 스스로 이겨내려고 하시는 모습을 응원하고 싶었고요.

 

R님이 지금 겪고 있는 마음은 상실에 대한 애도 반응의 단계를 거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퀴블러 로스가 정리한 다섯 단계의 애도 반응이 있는데요,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보통은 사별을 했을 때 일어나는 반응이라고 하지만 영원히 이별을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어나는 반응으로 부정 – 분노 – 우울 – 타협 – 수용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지금 R님은 그 중에서도 가장 견디기가 힘들다고 하는 우울 단계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꾸만 드는 우울한 기분이나, 낮은 자존감, 스스로 자책하는 생각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지만 애도 반응의 단계는 시간이 흐르면서 지나갈 수 있고, 이 시기를 건강하게 보내면 마음의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존감의 회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나 스스로 보기에도 자존감의 변화가 크다고 생각하고 있으시니까요. 이전에 심리 치료를 받았을 때 칭찬과 긍정적인 이야기는 안 듣고 부정적이고 질책하는 이야기만 크게 받아들인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셨는데요, 이런 모습 역시나 평상시에 자존감이 많이 낮아져 있는 것을 반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나온 맥락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정확한 해석은 아닐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자존감이 낮은 상황에서 이렇게 부정적인 이야기가 민감하게 받아들여지거든요. 이별 상황에서도 자존감이 낮아지다 보면 자꾸만 내가 그 여자보다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웠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별이 내 책임인 것 같고 나를 자책하게 되는, 그러면서 또다시 자존감이 낮아지는 악순환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하죠.

 

사진_픽셀

 

이렇게 낮아진 자존감을 한 번에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만, R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두 가지 이야기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R님은 R님 나름의 장점이 있으니까 내가 부족해서 남자친구가 바람이 난 거라는 생각을 멈추면 좋겠습니다. 바람을 핀 남자친구가 잘못한 거지 R님이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이렇게 생각을 해야 앞서 이야기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거에요. 여기에 더해서 손상 받은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은 단지 한 번 생각을 바꾸는 것 만으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안 좋은 말을 들을 때 크게 받아들이는 것, 나쁜 일을 자꾸만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오랜 기간 형성된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 생각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단기간이 아니라 꾸준한 상담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저희가 드리는 말이 지금 당장 R님의 고통을 얼마나 덜어드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드네요. 그래도 조금이나마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자존감을 하나씩 되찾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리고 비록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R님이 이 상황을 극복해 낸다면, 이 경험이 나중에는 R님의 자존감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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