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오동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P씨의 사연:

안녕하세요, 방송 잘 듣고 있는 애청자입니다.

저는 사람들을 사귀는 문제에 있어 남모르는 고민이 있어요.

 

저는 학교 다닐 때 남학생들한테 제법 인기가 있는 편 이었습니다. 친절하고 애교 많은 제가 좋다면서 고백해 오는 사람이 꽤 많았는데 저는 진심이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다 거절해 버렸지요. 언젠가 술에 취한 동기가 묻더라고요.

 

"넌 도대체 어떤 남자라야 만족할 수가 있는 거니?"

 

저는 "엄마처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이라고 대답했는데 다들 그건 너무 어려운 거라고 했습니다.

 

역시나 그 말이 맞았어요. 저는 서른이 넘도록 엄마처럼 완전한 사랑,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그런 사랑만 기다리다가 저 좋다는 멋진 남자들 다 놓치고... 연애도 결혼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사진_픽셀

 

저는 외동딸입니다. 엄마는 저를 30대 중반의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낳으셨어요. 뒤늦게 본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 엄마는 정말 너무나도 헌신적으로 사랑을 주셨습니다. 제가 필요로 하는 건 뭐든 해주셨고, 외롭지 않도록 사랑도 듬뿍 표현해 주셨어요. 엄마랑 있으면 저는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반면 아버지는 법조인이셨는데 일이 바쁘셔서 늘 늦게 들어오셨고 어쩌다 주말에 한 번씩 안아 주는 게 다였어요. 그러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때 바람이 나서 가출하셨고, 심지어는 평생 모아 놓은 재산을 주식으로 모두 날리시고는 대학교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남겨 놓으신 거라곤 살고 있는 아파트 하나가 전부였죠.

 

저는 엄마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엄마 없이는 이 세상을 살 자신이 없어요. 하지만 지금은 뭔가 제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일부러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데.. 솔직히 엄마 같지 않은 사랑이란 게 어떤 건지, 존재하는지조차 잘 모르겠더라구요. 몇 번 나쁜 사람도 만나게 되면서 점점 좌절만 커져가고 있어요.

 

저는 왜 이럴까요? 엄마가 정말 좋지만 엄마 같은 사람은 만날 수 없는 제 상황이 너무 힘들기만 합니다.

 

사진_픽셀

 

뇌부자들의 답장: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주는 사람을 찾지 못해 힘들다는 사연을 보내주셨네요. 그러한 마음이 문제인 걸 알고 있지만 막상 어떻게 고쳐야 될지 몰라 고민을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짧은 사연 만으로 모든 걸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저는 어머니께서 보여주신 헌신적인 모습만큼이나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지금의 상황에 크게 작용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특히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간 이후로는 아버지에게 버려졌다는 생각으로 줄곧 괴로우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 상황에서 P씨께서 기댈 수 있었던 건 당연히 어머니 밖에 없었을 거 에요. 워낙 끊임없이 사랑을 표현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으니까 더욱이 그랬겠죠. 혼자 남겨진 어머니 역시 하나뿐인 혈육인 P씨께 분명 심적으로 의지를 하게 되셨을 겁니다. 그렇게 두분께서 서로의 상처를 감싸고 지낸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느새 두 분의 관계는 단순히 부모와 자식 간의 애착이 아닌, 일종의 심리적 유착 상태가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아이는 누구나 부모에게 의존하며 자라납니다. 처음에는 부모가 먹여주는 음식이 없으면 생존하지 못할 정도로 부모의 역할이 절대적이지요. 그러다 점차 부모의 도움없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다방면에서 늘어나고,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이 형성되면 결국 한 명의 성인으로 독립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외형적인 독립뿐만 아니라 심리에 있어서도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일어납니다. 어린 아이는 부모의 적절한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만 건강한 정신구조를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부모의 모습은 아이 속에 내재화 되어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이렇게 아이는 점차 부모의 지지가 없는 상황에서도 타인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지요. 그러한 관계와 경험이 축적되면서 정신구조가 성숙해지면 자연스럽게 부모와 심리적으로 분리가 되게 되는데, 이것이 심리적 독립입니다.   

 

사진_픽셀

 

그런데 간혹 성인이 되어서도 심리적 독립을 이루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유년기에 부모와의 관계에서 강렬한 정서적 경험을 한 경우를 들 수 있지요. 이러한 정서적 경험은 부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것도 포함하는데, P씨께선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는 동시에 어머니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받는 경험을 하셨잖아요. 그 결과 P씨의 마음속에는 ‘나에겐 어머니뿐이다, 어머니만이 나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 준다’ 라는 생각이 깊게 각인 되었고, 지금까지 이성과의 만남과 관계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자면 무의식 속에서 어머니와의 관계를 각각의 독립된 인격체 간의 관계 맺음 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공동 운명체로 받아 들이고 계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마 P씨께서도 이러한 점을 어느정도 인지하고 고쳐보려고 노력 하셨을 겁니다. 본인의 문제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굉장히 중요하고 의미가 있지만, 말씀 하신 대로 그것을 아는 것 만으로는 충분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렵습니다. 특히 P씨의 경우에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관련된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이 내면에 억압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어머니에 대한 이상화(idealization)의 이면에는 어린시절에 아버지로 부터 받아온 상처가 분명 존재하고 있을 겁니다. 저는 이러한 감정의 소화가 어머니와 같은 사람을 찾으려는, 어쩌면 조금은 비현실적 일 수 있는 소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회가 되신다면 정신치료를 받아 보시는 것을 권유 드립니다. 치료자의 도움을 받아 감정을 방출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기회를 갖는다면, 고민하고 계신 문제의 해답에 좀더 빨리 가까워질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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