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20대 후반의 미혼 여성 A입니다. 작년 하반기에 우울증세가 심하게 와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게 되었고, 2주 간격으로 간단한 상담과 함께 약 처방을 받았습니다. 상담 시간은 5분 정도로 간단히 컨디션을 묻는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고, 다행히 약이 잘 맞아서인지 한달도 안되어 거의 정상 컨디션을 되찾았습니다. 잡념이나 우울한 감정들이 줄어들면서 활기를 되찾았어요. 그래도 선생님께서 재발 예방을 위해 약을 최소한 6개월 이상 복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계속 치료 중인 상태에요.

 

그런데 오늘 말씀 드리려는 것은 이 우울증에 관한 게 아니에요. 문제는 제가 선생님에게 느끼는 호감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는 겁니다. 처음 병원에 방문했을 땐 정말 거지 같은 꼴로 갔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점점 신경이 쓰이더군요. 진료 예약일이 다가오면 이 옷 저 옷 다 입어보느라 옷장을 다 헤집어놓고, 화장도 다시 하고 뾰루지는 컨실러로 가리고… 6개월이 지나도록 이러고 있으니 저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고 이게 뭐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정말 너무나 설렙니다. 당연히 선생님 앞에선 이런 마음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어요. 부끄러운 것도 그렇지만 그러면 안될 것 같아서요. 선생님이 40대 이상의 기혼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더더욱 포커페이스를 유지 하려고 노력해요. 그래도 혹시 선생님이 내 마음을 알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불안하고 신경이 쓰이긴 합니다. 

 

사진_픽사베이

 

이제는 제가 병원에 왜 가는지조차 헷갈리네요. 치료 목적으로 가는지 선생님이 보고싶어서 가는지... 부끄럽지만 선생님이랑 포옹하는 상상도 해보고,  집에 오면 너무 설레서 막 뒹굴기도 하고요. 이러한 제 상태를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전문용어로 ‘전이’라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연글을 통해서 정신과 선생님들께 여쭤보게 된 건데, 저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건가요? 병원을 옮겨서 상사병 치료를 받아야 할까요? 사실 호감을 갖고 만나는 제 나이 또래의 사람이 있었는데, 선생님을 만난 이후로 그 사람이 남자로 안 보여서 연락을 차단해버린 상태입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안녕하세요, 뇌부자들 입니다.

 

작년부터 진료를 받아 온 주치의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보내 주셨네요. 우선 심했던 우울감과 무기력감이 치료 후 빠르게 호전 되셨다고 하니 참 다행입니다. 일반적으로 항우울제 복용 후 우울 증상이 좋아지는데 2달 이상 걸리기도 하거든요. 이렇게 호전이 빨랐던 데에는 물론 약의 효과가 크겠지만, 주치의 선생님과의 좋은 관계도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 호감이 자꾸만 커져서 이렇게 사연으로 보내주실 만큼 고민이 되셨나봐요.

 

말씀하신 대로 지금 겪고 계신 감정이 일반적인 것으로 보기에는 쉽지 않은 만큼, 전이로 인해 유발된 가능성이 높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이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면, 지금 누군가를 대할 때 내 안에서 생겨나는 감정이 사실 과거에 다른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겪었던 감정의 재현으로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감정은 물론 지금 A님처럼 긍정적일수도, 반대로 부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전이의 예를 들어볼까요? 엄격한 성격에 낮은 목소리를 가진, 무서운 아버지를 둔 사람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게 됐는데, 마찬가지로 목소리가 낮은 중년의 의사를 보니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심한 불안과 긴장감을 느끼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네요. 또 때로는 과거에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판타지 속에서 꿈꿔왔던 대상과 겹쳐 보이는 사람에게 강한 전이 감정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엄격한 아버지를 둔 탓에, 반대로 상상해왔던 자상하고 친근한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의사 선생님에게는 강한 호감을 느끼게 되는 식으로요.

 

사진_픽사베이

 

정신과 면담에서는 감정과 생각을 살펴보는 과정이 치료의 중요한 요소인데요, 그래서 이런 여러 전이 감정들을 단서로 해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내 마음 속을 살펴 보곤 합니다. 앞서 예로 들었던 중년의 의사를 대할 때 느끼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대해서 면담을 통해 함께 탐색하다 보면,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지금 나와 내 대인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알게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전이 감정들은 진료실에서의 의사-환자 관계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맺어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생길 수 있겠죠. 다시 말해서 이런 ‘알 수 없는 감정’들은 우리가 그 이유를 의식하지 못할 뿐,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생길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님께서 지금 주치의 선생님에게 느끼는 이성적인 호감 역시 부적절하거나 병적인 것이 아닌 만큼, 지나치게 자책하거나 불편한 마음을 느끼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무엇보다 드리고 싶어요. 또 지금의 감정을 주치의 선생님이 알게 될까봐 많이 걱정이 되고 신경 쓰인다고 했는데, 역시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선생님에 대한 감정과 고민되는 마음을 진료시간에 열어보고, 이 감정에 대해서 주치의 선생님과 함께 앞서 말씀드린 ‘마음의 탐색’을 해 보시길 권유 드려요.

 

사실 환자의 전이 감정은 워낙에 정신과 의사들이 세밀하게 살피는 부분이라, 그 선생님께서도 이미 A님의 감정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고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A님께서 도저히 말씀을 꺼낼 용기가 안 나실 수도 있고, 주치의 선생님께서 현재로서는 깊이 있는 분석적 면담을 해 주실 진료 여건이 안 되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 만약 지금의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커져 A님을 힘들게 한다면 다른 정신과 선생님과의 별도의 면담 치료 역시 고려해 보시길 권유드립니다. 면담을 통해서 A님의 연애를 비롯한 전반적인 인간 관계, 마음 속 갈등과 결핍, 크고 작은 고민들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거에요. 추측이긴 하지만, 지금의 감정을 잘 이해함으로써 얼마 전까지 A님을 힘들게 했던 우울감과 무기력함의 이유를 찾아낼 가능성도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방송으로만 만난 저희를 믿고 남들에게 말하기 힘든 고민을 이렇게 보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드리는 조언이 A님의 고민을 덜어드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또한 이 사연을 바탕으로 한 방송을 통해 청취자분들도 스스로의 감정과 대인관계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실 수 있을테니, 단순히 A님의 궁금증을 해결하는 정도를 넘어서 더욱 의미있는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날로 무더워지는 날씨에 건강 조심하세요.

 

뇌부자들 드림.

 

해당사연 링크:

http://www.podbbang.com/ch/13552

 

(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뇌부자들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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