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최준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일러스트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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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이나 일상에서 중요한 과제를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붙들고 있다가 마감 직전에야 엄청난 압박감 속에서 해내는 경험을 반복하고 계신가요? 이러한 만성적인 미루기 습관(Procrastination)을 단순한 버릇이나 게으름으로 치부하기 전에, 성인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ADHD)의 한 증상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 습관은 의도적인 태만의 문제가 아닌, 뇌의 실행 기능 중 특히 작업 시작(Task Initiation)과 시간 관리 영역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ADHD를 가진 성인들이 미루기를 반복하는 이유는 도파민 시스템의 작동 방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은 당장 눈앞의 보상이 불확실하거나, 지루하고 복잡하게 느껴지는 장기적인 과제에 대해 동기 부여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뇌는 즉각적이고 높은 강도의 자극에 반응하도록 설정되어 있는데, 마감이 임박하여 생기는 '마감 공포'는 바로 이 강렬한 자극을 제공합니다. 이 극도의 스트레스와 압박감은 뇌의 도파민 분비를 일시적으로 끌어올려, 비로소 작업 시작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종의 '비상 부스터'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패턴이 굳어지면, 평소에는 무기력하게 느껴지던 과제도 마감 직전의 압박감 속에서만 몰입하여 처리하는 습관, 즉 '마감 의존성'이 형성됩니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는 높은 불안감과 죄책감을 느끼지만, 성공적인 결과가 나올 경우 그 경험이 강화되어 습관이 고착화됩니다. 이 미루기 행태는 자기 조절 능력의 문제가 아닌, 비효율적인 시간 인지와 충동 조절이라는 ADHD 증상의 표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인 ADHD의 미루기 습관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실행 기능 중 특히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을 효과적으로 보조하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업 기억은 정보를 잠시 붙잡아두고 조작하여 복잡한 작업을 처리하는 인지 능력으로, ADHD를 가진 이들에게는 취약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마치 컴퓨터의 램(RAM) 용량이 부족한 것과 같아서, 과부하를 막고 기억의 부담을 덜어주는 외부적인 장치들이 필요합니다.

미루기 습관에 대처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외부화입니다. 해야 할 일, 중요한 정보, 아이디어 등 모든 것을 물리적으로 또는 디지털로 눈에 잘 띄게 기록하여 즉시 기록하고 시각화해야 합니다. 작업 기억에 의존하는 대신, 화이트보드, 포스트잇, 알림 앱 등을 사용하여 정보를 항상 외부화합니다. 특히, 과제의 최종 목표 대신 당장 다음에 해야 할 단 하나의 구체적인 행동을 명확하게 적어두어 작업 시작의 장벽을 낮춥니다. 또한, 시간 개념이 추상적으로 느껴질 때, 타임 타이머(Time Timer)와 같이 남은 시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비를 활용하여 시간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인지하도록 돕습니다. 25분 집중, 5분 휴식과 같은 포모도로 기법을 활용하여 짧고 명확한 작업 블록을 설정하면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유리합니다.

 크고 막연한 과제(예: 보고서 작성)를 세분화하여 5분 안에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행동(예: 보고서 폴더 생성, 첫 문장 쓰기)으로 나누는 '쪼개기'의 습관화가 필요합니다. 과제를 너무 크게 인지하면 압도당하여 미루게 되므로, 이 분해 과정이 작업 시작을 촉진합니다. 더불어, 장기적인 목표 달성에 따른 먼 미래의 보상 대신, 세분화된 작은 단계를 완료할 때마다 작은 보상(예: 좋아하는 음악 1곡 듣기, 5분 휴식)을 즉시 제공하여 즉각적인 보상을 설정함으로써 도파민 시스템을 활성화합니다. 이를 통해 지루한 작업에 대한 동기를 즉각적으로 부여할 수 있습니다.

 집중해야 할 시간에는 스마트폰 알림 끄기, 불필요한 탭 닫기, 특정 웹사이트 차단 앱 사용 등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환경 요인을 사전에 제거하여 작업 기억의 부하를 최소화하는 '방해 요소 차단'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만성적인 미루기 습관은 뇌의 정보 처리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정확한 평가를 받고, 뇌의 특성에 맞춘 외부 보조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구축해 나간다면, 마감 공포 없이도 안정적으로 과제를 수행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삼성양재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최준배 원장

최준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양재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대학원 졸업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임의
전)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임상부교수
전) 삼성전자/삼성디스플레이 마음건강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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