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30대 후반 여자입니다. 저는 아이처럼 해맑고 순수한 성격의 저를 좋아합니다. 감정 표현도 풍부하게 잘하고, 여전히 만화 보는 것도 좋아하고, 이성을 좋아할 때는 십대 소녀가 된 것처럼 좋아해요. 그런데 마흔 가까이 되다 보니 이게 제 성격인지 철이 없는 건지, 착한 건지, 모자란 건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어요.

저는 동화 같은 세상 속에 살고 싶어요. 제가 밝은 세상을 만드는 일원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대중교통 운전기사님께도 인사를 꼭 하고 명절이면 작은 과자도 선물하곤 했어요. 제가 이용하는 카페, 헬스장 직원, 대중교통 기사님 모두 친구처럼 지내고, 길 가다 만난 사람과도 수다를 떨고 친절을 베풀었어요.

그런데 세상은 동화같지 않죠. 제 친절을 오해해서 불편한 관계가 되거나 성추행하는 남자들도 많고 만만하게 생각해서 쉽게 성질을 낸다던가 부당한 요구를 아무렇지 않게 하기도 합니다. 괜히 길에서 마주친 행인에게 험한 소리를 듣기도 하고요.

그래서 요즘에는 가족 외에는 말을 걸지 않고 오프라인 쇼핑도 거의 하지 않아요. 누가 말을 걸어도 모른 체하고요. 그러니 상처받을 일은 많이 줄었는데 사는 게 이전처럼 신나지는 않네요. 우울한 건 아니지만 무미건조하달까요? 

어른들 세계에서는 사람도 적당히 믿고 자기 밥그릇 먼저 잘 지킬 줄도 알아야 하고,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선을 분명하게 해야 할 것 같아요. 친구보다는 인맥이고 가족 외에는 남, 남자도 능력을 먼저 따져 보고 만나야 할 것 같은데, 저는 너무 어른 같고 강하고, 완전한 남자를 만나면 거부감이 들어요, 저보다 너무 멀리 나아간 사람 같아서 따라 걷기가 버거울 것 같아요. 

그런데 삭막하다고 생각했던 어른들 세계가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해야 돌아가는구나 하고 이해가 됩니다. 그간 순수함을 잘 지키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덜 자란 거였나 하는 불안감이 듭니다. 그렇다고 제가 매정하다고 느꼈던 방식으로 사람들을 차갑고 단호하게 대하려니 잘되지 않아요. 어색하고 이게 맞나 싶고 타인이 상처받을까 봐 두렵기도 하고, 내 매정한 태도에 타인이 공격하진 않을까 겁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동안일 수 없는 얼굴과 애 같은 제 행동, 말투가 엇맞는 것을 내버려 두기도 참 그래요. 이제 저는 어떻게 자라나야 하는 걸까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어른답게 행동할 줄 알았는데, 마치 결혼도 때 되면 자연스레 좋은 사람 만나 하게 될 줄 알았지만 아니듯이, 맞선 보듯 무엇을 노력해야 하나요? 몸은 늙어 가는데 나는 멈춰진 기분이에요. 나는 내가 좋은데 몸이 늙어 가서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기도 하고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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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남겨주신 사연 잘 읽어보았습니다. 순수하고 아이 같은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지만, 세상이 원하는 모습과 다른 것 같고 마냥 순수하게 세상을 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움을 많이 느끼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우선 불신과 경계가 일상화되어 있는 이 시대에 아직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갖고 계시다니 참 부럽기도 하고 좋은 성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과 대가 없는 호의를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에 어느 정도 만족하면서도 의문을 갖습니다. 나는 나에 대해 별 불만이 없는데, 주변 사람들은 나의 이런 점이 단점이라고 바꾸기를 종용하기도 하고, 반대로 내가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면을 주변 사람들은 장점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또, 장점과 단점이 중첩되는 경우도 많지요. 

사연자님 역시 그러신 것 같습니다. 아이 같고 순수한 면이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로 인해 관계가 불편해지고 심한 경우 성추행이나 막말을 듣기도 하셨다니 염려되는 부분이 있으시겠습니다.

아이 같고 순수한, 친절과 호의를 베푸는 그 마음 자체가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연에 남겨주신 것처럼 그 마음을 악용하거나 사연자님을 함부로 대하는 경우들이 있기에 주의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사연자님이 타인에게 좋은 마음을 가진 것처럼 모두가 그렇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사연자님을 지키기 위한 명확한 경계 설정과 자기주장, 거절에 대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호의를 베풀고 친절하다는 것이 곧 사연자님의 신체, 재산, 시간 등 유무형의 자산을 함부로 취하고 이용해도 된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연자님 역시 그런 결과를 바라고 좋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시는 것은 아닐 테지요. 상식적이고 경우가 있는 사람이라면 경계를 함부로 넘거나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중에는 분명 자신과 타인의 경계, 지켜야 하는 선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그 선을 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연자님이 호의를 베풀 때 스스로 얼마만큼까지 내어줄 수 있는지 경계를 설정하시고, 과도한 요구나 무리한 부탁은 단호하게 거절하시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아마 지금 그런 연습 과정 중이신 것 같습니다. 지금은 타인과의 교류를 최소화하고 스스로는 매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단호하려고 노력하고 계시지요. 무조건적 친절과 호의, 철저한 외면과 무응답 사이에서 적절한 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직 그 적당한 경계가 어디인지, 순수한 마음으로 친절과 호의를 유지하면서도 스스로를 다치지 않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예 관계를 차단하는 방식을 택하신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원래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것 같은 마음에 삶이 무미건조하고, 진실되지 못한 것 같은 괴리감을 느끼시는 것일 테지요. 하지만 지금의 이 시간이 정반합의 과정이라고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원래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아이와 어른의 세상, 그 둘이 갈등하며 마침내 합을 찾아가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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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함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순수함과 순진함은 다릅니다. 순진함이 마음이 꾸밈없이 순박한, 세상을 알지 못한 채 티 없이 맑은 상태를 의미한다면, 순수함은 세상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신과 주관을 가진 채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순진함이 어린아이의 전유물이라면 순수함은 나이를 뛰어넘는 것이지요.

사연자님은 순수함과 순진함 중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신가요? 혹시 순수함이 아닌 순진함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닌지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아이같이 해맑고 세상을 곱게 바라본다고 여기면서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요. 

사연 말미에 이제 어떻게 ‘자라나야’ 하는지 물어보신 사연자님의 질문을 통해 사연자님이 스스로를 성인이 아닌, 아이로 생각하고 계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성인이 되기를 거부한 채 소녀로 남고 싶어 하는 ‘피터팬 증후군’을 보이고 계신 것 같기도 합니다. 

타인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친절을 베푼다고 하신 그 이면에 어떤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지 더 깊이 살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의 순진함과 해맑은 태도는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하고, 세상을 밝게 만듭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스스로를 지키거나 자립할 수 없기에 늘 보호자와 주변의 관심, 지지가 필요합니다. 아이들은 모든 사람이 항상 호의를 갖고 자신을 대하는 것은 아니며,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지켜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사연자님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해맑고 순진한 마음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밝고 친절한 성품은 사연자님이 가지신 강점임이 틀림없습니다. 다만 그 강점이 사연자님의 신변이나 관계, 재정을 비롯한 삶의 중요한 영역을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오지 않게 하기 위해선 변화해야 할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순진함이 ‘순수함’이 되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연자님이 감당할 수 없는 요구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연습, 타인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무조건적 친절을 베풀거나 본인의 욕구를 억누르기보다 스스로의 욕구를 들여다보며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연습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무엇보다 성인으로서 본인의 삶을 책임지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외강내유처럼, 부드럽고 친절한 미소, 해맑고 따뜻한 성품을 잃지 않으시되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내면의 단단함을 갖춘 사연자님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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