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제가 진단받은 정신 병력으로는 우울증, 범불안장애, 섭식장애가 있고, 저의 타고난 기질은 내향인에 예민하며, 회피 성향과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 사촌 오빠에게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고, 아버지는 폭력적이었으며 어머니는 일이 바빠서 저를 돌봐 줄 여력이 없으셨습니다. 대가족이 살았기에 저에게 집은 편한 곳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학창 시절에 친했던 친구들에게 배신당한 경험과 ‘은따’라고 하죠… 혼자 남겨진 경험들이 있어서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게 됐습니다.

아마 그즈음부터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심해졌던 것 같아요. 제가 힘들 때 부모님은 아무런 조치도 취해 주지 않아서 저는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느꼈던 주된 감정들은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혼자라는 외로움,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불안함, 하고 싶은 것도, 잘하는것도 없다는 무기력감, 아버지에 대한 분노 등입니다.

제가 성인이 된 후로는 어디서 일을 하든 금방 그만두기 일쑤였는데, 그 이유는 이상하게도 일하는 곳마다 사장님들이 막말을 심하게 했습니다. 직원들과 어울리지도 못했고요. 두세 번이면 빅데이터라는 생각이 안 들 텐데, 다섯 번 정도의 비슷한 경험이 쌓이다 보니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게 두려워졌습니다.

막말을 들을 때나 주변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제 모습을 보며 ‘아… 내가 일머리가 없어서 그렇구나. 내가 소극적이라 그렇구나.’ 하는 자괴감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그렇게 욕먹을 일인가?’ 하는 수치심도 느낍니다. 또한 상대방이나 상황 탓을 해도 분노와 무력감만 더 느껴집니다.

지금은 혼자 할 수 있는 곳에서 일을 하는데, 아직도 초보자나 할 법한 실수를 가끔 하긴 합니다. 그래도 처음으로 일 년 넘게 일하고 있는데 이곳도 역시나 사장님이 다혈질이라 막말을 할 때마다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제 부정적 빅데이터는 더 견고해졌고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기에, 새로운 일에도 도전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은데, 저는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파국화, 부정 편향 등의 모든 인지 왜곡은 다 가지고 있고, 수동공격, 투사 등 잘못된 분노 표출도 하고 있어 정말 총체적 난국인 상황입니다.

어떻게 해야 제 부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경험에서 벗어나 조금 더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상처에도 좌절하지 않으며 나아갈 수 있을까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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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사연자님께서 올려 주신 고민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으로 인해 미래마저 부정적으로 예상하게 되고, 사연자님의 미래를 위해 직업적인 영역에서도 좀 더 발전하고 싶은데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에 대한 망설임이 크다 보니 고민이 더욱 깊으신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어린 시절 대가족 안에서 많은 가족들과 부대끼며 살아오셨지만, 폭력적인 성향의 아버지나 어린 사연자님을 세심하게 돌봐 주지 못했던 어머니의 슬하에서, 그리고 어린 나이에 사촌 오빠로부터 성희롱을 당하는 등 힘든 일을 겪으면서 가족 구성원 간에 애정이나 친밀감을 형성하거나 타인과의 건강한 상호작용을 경험하고 배울 만한 기회가 별로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가족 간에 애정적이고 친밀한 관계에 대한 경험보다는 언제 폭력적으로 돌변하거나 화를 폭발할지 모를 아버지에 대한 불안감과 어머니의 무심함으로 인해 불안하고, 두렵고, 외로운 유년기를 보내 오신 듯하여 마음이 아픕니다. 

이렇듯 어린 시절에 가족으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이나 따뜻한 관심과 지지를 받아 왔던 경험이나 기억보다는 부정적인 인식과 감정이 쌓이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이 사연자님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을 수 있고, 이것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작더라도 무언가를 목표로 삼아 시도해 보고, 실패해도 가족이나 친구와 같이 가까운 주변인들로부터 지지와 응원을 받아 다시 도전함으로써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작은 성취감을 느껴 보는 경험들을 쌓아 가는 것이 중요한데, 사연자님께서는 성장 과정이나 일상에서 이러한 경험들이 많지 않으셨으리라 짐작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누구나 ‘인정 욕구’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시도하고 성공함으로써 성취하고 자신의 능력을 중요한 대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경험을 통해 쾌감과 만족감을 느끼고, 또 다른 시도나 성취를 위한 노력을 계속 이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이죠.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인정 욕구가 채워지는 경험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인정 욕구 이전에 채워져야 하는 욕구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애정 욕구지요. 자기 존재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그 안정감과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아이들은 불안감 때문에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동기나 집중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성인이 된 우리 어른들에게도 이러한 애정 욕구와 인정 욕구가 채워지는 경험이 필요하고도 중요한 것이죠. 

안타깝게도 사연자님께서는 어린 시절에 중요한 대상(대부분 부모님)으로부터 이러한 욕구가 채워진 경험이 많지 않으신 듯합니다. 그렇다면 바꿀 수 없는 과거를 곱씹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요? 물론, 그러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고통스러움만을 느낀다면 공연히 아픈 상처를 후비는 일밖에 되지 않겠지요.

하지만, 사연자님께서는 자신의 성향은 물론, 어린 시절의 결핍과 힘든 마음들을 꺼내 놓고, 이것이 현재 사연자님의 삶과 마음 그리고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결핍을 어떻게 치유하고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심하며 도움을 청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자신의 결핍이나 마음의 상처, 심리적 고통의 실체를 인식하고 해결 방법을 찾는 시도 자체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첫걸음이 되어 줄 것입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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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어린 시절 중요한 대상과의 관계나 지나간 과거의 경험을 되돌리거나 바꿀 수는 없지만, 그러한 과거의 부정적 경험이 현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인식하고, 점차 그러한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음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과거의 경험이나 사건들을 이성적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하려 들기 전에 상처받은 어린아이의 시점으로 돌아가서 그 마음들을 가감 없이 충분히 느껴 보고 수면 위로 끌어 올려 표출해 보는 것이 억압된 감정들을 풀어 주는 데 도움이 됩니다. 억압된 감정들은 절대로 그냥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어떠한 흔적이나 부정적인 감정 상태, 신체적 아픔 등으로 쌓이기 마련이므로 그러한 마음들을 지금이라도 알아주고 어루만져 주고 해소해 주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말로 표현해 보든, 글로 써 보든… 조그맣고 어렸던 아이가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 억압했었던 많은 감정들을 한번 마음껏 표출해 보세요. 슬픔이라는 감정이 느껴지시면 펑펑 눈물을 흘리셔도 좋고, 가만히 자기 자신을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봐 주셔도 좋습니다. 스스로를 토닥토닥 다독여 주거나 따뜻하게 안아 주셔도 좋고요.  

그렇게 과거에 억압된 감정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느껴 보고 흘려보내면서 편안하게 감정을 다루는 훈련을 꾸준히 해 보시고, 일상생활에서도 적용해 보세요. 그리고 직장에서 사장님이나 상사들이 ‘막말’을 할 때 그대로 흡수하지 마시고, 아무리 회사의 직원이고 아랫사람이라 하더라도 예의를 지켜서 이야기해 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연습 또한 해 보셨으면 합니다.

이를테면 상대의 ‘막말’에 일말의 진실이나 사연자님의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되 상대의 무례한 ‘막말’에는  불쾌감을 강렬한 눈빛으로 불쾌감을 표현하거나 그 말의 의미를 되물으면서 상대의 표현이 선을 넘었다는 의사 표시를 명확히 해 두는 것이죠.  

그리고 사연자님께서 도전하고 싶은 새로운 일이란 무엇인지, 어떤 일이 사연자님의 적성이나 흥미에 잘 맞을지 조급함을 버리고 조금 긴 안목과 시간적 여유를 두고 고심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평소 관심이 있거나 소질이 있다고 생각되는 분야를 하나둘씩 시도해 보신다면 어떨까요. 당장에 큰 성취나 목표를 이루지 않더라도 그것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작은 기쁨과 성취감을 맛보는 일 자체가 만족감과 또 다른 동기부여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죠.

 

마지막으로, 파국화나 부정 편향, 투사와 같은 인지 왜곡의 문제가 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사실 이러한 인지 왜곡이 있는 사람이 스스로에게 이러한 인지 왜곡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데, 사연자님께서는 이미 전문적인 용어까지 잘 이해하고 있을 만큼 자신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높은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충분히 자신의 인지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자원이 풍부한 분이라는 인상 또한 받았고요. 

인지 왜곡을 바로잡는 훈련을 꾸준히 해 나간다면 충분히 좋아질 수 있을 텐데요, 인지 왜곡을 많이 겪는 분들은 흔히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부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즉 부정적 자기-스키마가 작동되기 쉽습니다. 이를 흔히 ‘핵심 믿음(core belief)’이라고 하는데요, 어릴 때부터 중요한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나 주변 환경의 영향 등을 받아 이 핵심 믿음을 발전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비슷한 주제나 상황이 주어지면 이 핵심 믿음이 포함되는 스키마가 활성화되면서 새로운 경험도 자신의 핵심 믿음에 따라 해석하고, 또다시 활성된 스키마가 핵심 믿음을 강화하는 식으로 반복되는 것이죠.

따라서 자신의 핵심 믿음이나 부정적 자기-스키마, 자신에게 반복되는 인지 왜곡이나 정보처리의 오류 등을 탐색해 보고 교정해 나간다면 얼마든지 사연자님의 인지 왜곡이나 핵심 믿음, 부정적 자기-스키마 등을 바꿔 나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핵심 믿음이나 부정적 자기-스키마를 교정해 나가는 것이 단 한두 번의 연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일상에서 꾸준한 훈련을 통해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는 작업임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예를 들면, 사연자님께서 직장에서 누군가에게 막말을 듣거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할 때 ‘내가 일머리가 없어서 그렇구나.’라고 자책하기보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실수할 수도 있고, 항상 훌륭하게 수행할 수만은 없다는 균형 잡힌 관점을 떠올려 부정적인 편향을 반박하고, 정보처리의 오류를 바로잡는 훈련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치유의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많이 버겁고 어렵다고 느껴지신다면, 전문적인 치료나 상담의 도움을 받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우울증과 범불안장애, 섭식장애 등 복합적인 어려움을 겪고 계신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약물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제는 과거에 사연자님께서 받았어야 할 보살핌과 인정 그리고 애정을 사연자님 스스로든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함께하든 잘 치유되셔서 거기서 해방되고 나아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응원하겠습니다.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대구가톨릭대병원 의과대학 학사 , 석사
대구가톨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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