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개인적 입장과 대외적 입장이 다른 경우가 생긴다. 결혼에 관해 묻는 친척 어른들 앞에서 5년 이내에 결혼할 생각이 있다고 말한 친구는 사실 평생 결혼할 생각이 없다.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개인적인 입장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하는 공식적인 자리가 늘어가는 듯하다. 타인을 설득하거나 괜한 언쟁을 하기 싫어 개인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경우도 많다.


친구들끼리 여행을 계획할 때 1/N로 비용을 내야 한다는 게 나의 공식적인 입장이지만 개인적인 입장이 슬그머니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함께 가는 친구 중 A는 착하고 다정한 성격으로, 여행 중 수많은 잡일을 나서서 처리했다. 또한 형편이 빠듯해 정기적으로 걷는 회비를 조금씩 적게 냈다. 조금 모자란 정도는 눈감아주고 싶은 것이 나의 사적인 입장이나, 회비를 걷는 총무로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공적, 사적인 입장에 따른 내적 갈등은 특히 직장에서 여실히 드러나며 곤란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직장은 그 어느 곳보다 공적인 자리이기 때문이다. 대표를 포함해 온 직원이 모인 회의 자리에서 신입사원 C가 새로운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대표는 좋은 시도지만 당장 실행하기에 어설프다며 아이디어를 반려했다. 팀장 B는 사실 C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지만, 대표와 임원들의 뜻을 따라 자신도 반대의사를 밝혔다. 성공 가능성보다는 실패 위험성이 더 커 보인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결국 C는 오랫동안 준비해 온 프로젝트를 접어야 했다. B팀장의 입장은 이해 하지만 서운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처럼 공적인 입장과 사적인 입장이 다를 경우, 우리는 공적인 입장을 우선시 하게 된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며 자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공적인 입장과 사적인 입장을 다를 때, 우리는 사적인 입장을 말 할 수 없는 걸까? 이성을 중시하는 나라독일에서 16년간 총리를 역임한 메르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출처: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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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첫 여성 총리 메르켈(Angela Merkel)은 연속 4선의 재임을 했으며, 2021년 10월 16년의 재임을 마쳤다. 그동안 유로 위기, 난민사태, 브렉시트, 코로나 19등 다양한 난관에서도 탁월한 협상력과 리더십을 발휘했다. 신중하면서 뚝심 있는 성격으로 임기 내내 국민들의 신임을 받은 메르켈은 총리 고별을 앞두고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홀로코스트를 다시 한 번 사죄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8번째 방문이다. 총리 생활 마지막 방문을 이스라엘로 결정한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지도자인지 알 수 있다.


메르켈은 임기 초기부터 소속정당의 당론에 따라 동성결혼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표해왔다. 그런데 2017년 6월 30일 독일, 동성결혼 합법화 법안에 대한 연방의회 투표 논쟁에서 자신이 견지해왔던 입장에 모순된 말을 남겼다. ‘동성 커플의 입양에 찬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투표는 ‘의원들 개개인의 양심에 맡긴다’고 했다. 동성결혼은 합법화 법안에 통과했으며. 메르켈의 언급이 의회 투표에 영향을 주었을 거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메르켈은 투표 4일 전 한 좌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웃에 5명의 아이를 입양해 키우는 동성 커플이 있는데, 그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많은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메르켈은 개인으로서의 입장과 총리로서의 입장을 분리해, 영리하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순된 입장을 이해시켰다.


2021년 10월 3일 독일 통일 31주년 기념식에서도 메르켈은 개인으로서의 메르켈과 총리로서의 메르켈을 분리하는 방법으로 동독 출신의 국민들을 위로했다. 1990년 서독과 동독의 통일 이후, 동독 출신의 메르켈은 지금까지 독일의 통일을 자신이 속해있는 기민당의 업적이라 말해왔다.


하지만 31주년 기념식에서 그녀는 입장을 달리했다. 기민당의 역사를 다룬 책에 나온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동독 시절 35년 이력이라는 필요 없는 짐(Ballast)’이라는 표현을 언급했다. 그리고 "총리로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동독시민으로서, 동독에서 살았던 1,600만 명의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늘 우리가 통일을 기념할 수 있는 것은 동독에서 그들의 권리와 자유, 다른 사회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들 덕분”이라며, 그동안 기민당에 업적을 돌렸던 것과 달리 동독인들의 입장이 되어 이야기한 것이다.


메르켈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정치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메르켈은 총리로서 연단에 올랐지만, 동독 출신 독일 시민으로서 개인의 서사를 이야기했다. 누구도 메르켈이 그동안 공식적으로 취해온 태도 및 의견과 개인으로서 말하는 속내가 다른 점을 비판하지 못했다. 서사가 주는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독일 신문 ‘Die Zeit’에서는 메르켈이 '콜(통일 당시 독일 총리)의 작품'으로 남아있던 독일 통일의 역사를 시민들에게 돌려줬다’라고 평가했다. 서사는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그 개인에 대한 이해의 바탕을 만들어준다. 심리적 상태를 이해하고 동조하여 추론할 수 있는 원료가 되어 ‘공감적 감정이입’을 이끌어낸다.


Ohio 주립대학의 Suzanne Keen은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을 때, fMRI로 뇌를 촬영하면 일어나는 반응을 관찰했다. 그때 거울 뉴런 영역에 불이 들어오며, 거울 뉴런 시스템이 빠르게 반응하는 사람일수록 공감력 테스트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즉 서사에 잘 빠져들게 할수록, 설사 서사의 결과가 그 동안 공식적으로 얘기해 온 의견과 반대되더라도 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여행 시 잡일을 도맡아 하지만 회비를 부족하게 내는 친구 A가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 또한 내가 A의 서사를 다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감정에 공감하는 것이다. 아마도 마르켈은 서사의 힘을 누구보다 잘 활용했던 정치인 중 한명이었을 것 이다. 그 어느 곳보다 공적 입장이 우선 될 수밖에 없는 직장에서 서사의 힘을 잘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회의가 끝난 후, 아이디어가 반려되어 아쉬워하고 있는 신입사원 C에게 팀장 B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C씨 아이디어 신선하고 좋았는데, 힘을 못 실어줘서 나도 아쉬웠다네. 사실 내가 입사 초반에 냈던 아이디어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실패하고 팀은 해체 되어서 힘든 시기를 겪은 적이 있어. 그때 내 팀장이 리스크 분석을 하고 다시 쓴 보고서가 통과되고 나서야 2년 만에 우리 팀이 다시 모아졌지. 그 뒤론 위험성에 대한 대처 전략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어. 당장은 힘들겠지만 아이디어를 버리지 말고 리스크 분석도 보완해보게. 분명히 쓸 날이 올 거야.”


자신의 서사를 활용해 상대를 설득하는 일은 결국 속내를 전하고 마음을 풀어낸다는 점에서 용기 있는 진솔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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