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당산 숲 정신과, 이성찬 전문의] 

 

슬픈 일이 생기면 말할까 말까 고민하면서 결국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 적이 많다.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경험을 풀어야 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라는 말처럼 감정이란 혼자서 품고 있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해소될 수 있다. 기쁜 일이 있을 때 주변 사람에게 전화해서 그 사실을 알린다든가, 고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는 것과 같이 말이다.

마음 놓을 수 있는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인생을 성공한 거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나라는 사람을 공감해주고 이해해주는 친구란 즉, 사회적 위치나 각종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솔직해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친구를 떠올리면 무엇이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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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막상 고민이 있거나, 안 좋은 기분이 들면 말로 꺼내기 힘들다. 예컨대, 기분이 저조하고 머리가 복잡할 때 친구가 내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 기분이 안 좋긴 한데, 슬프거나 화가 나는 것은 아니고 약간 비참하다고 해야 하나?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망설여지고 만다.

자신의 기분에 대한 원인을 알고 있는 경우에도 비슷한 고민이 따라온다. 안 좋은 일, 그중에서도 말하게 되면 본인이 비참해지고 수치스럽게 느껴질 것 같은 이야기는 꺼내기 힘들다.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우습게 보이는 게 싫은 것일까? 나를 어리석게 볼까 봐 우려되기 때문일까?

우리는 어떠한 이유로 웅크려 있는 감정을 꺼내 보이는 게 어려운 것일까?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의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Beth Israel Hospital-Harvard Medical School의 Sifneos는 ‘감정표현 불능증(Alexithymia)’이란 용어에 대해 정서를 언어화하지 못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우리의 감정 및 내적 정서 경험은 흔히 쓰는 ‘기쁨, 슬픔, 분노’ 따위의 간명한 것이 아니라, 좀 더 미묘하고 복합적이다. 나쁜 기분이 들어도 그것이 어떠한 감정이라고 명확하게 표현할 방법이나 수단(언어)을 찾기 어렵다.

여러 학자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어린 시절의 영향을 꼽기도 한다. 감정 공유가 부족한 가정이었을 경우, 부모로부터 감정의 지지를 덜 받을수록 감정표현 불능증 성향이 높게 나타난다는 연구도 있다.

어떤 감정은 너무 갑자기 일어나거나 압도적이어서 어떤 감정인지 명확하게 알기 어렵기도 하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장례식장에서 울지도 못하고 멍하게 앉아 있는 것과 같이. 슬픔인지, 화인지, 무기력인지 알기 어려운 상태로 말이다. 또한 예상치 못한 상대의 반응을 마주했을 때 ‘이건 뭐지?’ 싶어 흘려보낸 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당황스러웠고, 화나 났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감정은 한 개의 명확한 정서만 담겨있는 경우가 드물다. 대게는 여러 가지의 감정이 섞여서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구별해서 알아봐 주지 않으면 감정을 담아낼 나만의 언어를 잃기 쉽다.

 

두 번째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상대의 눈치를 보거나 관계가 틀어질까 봐 말로 꺼내지는 않는 것이다. 감정을 표현할 경우 상대가 자신을 이상하고 나약하게 보거나, 관계가 어긋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반응인 것이다.

정서표현 양가성(Ambivalence Over Emotional Expressiveness)이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요구가 있지만 억제하며 갈등하는 것이다. 또는 표현한 후에 후회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개인의 안녕감에 높은 영향을 미친다. 갈등하거나 후회하는 과정에서 높은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친밀에 대한 두려움, 불안, 정서 중심대처로 인한 부적응이 작용한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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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이 느끼는 정서나 감정을 표현했을 때, 공감받지 못하고 오해되거나 거부되지 않을까 걱정해 말을 하지 않은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결과적으로 악순환을 일으킨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친구들로부터 지지받거나 수용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때문이다.

꼭 해소하려는 목적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말로 하는 경우보다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고 친밀감 형성에 두려움을 느낀다.

 

예전에 자신의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해 속으로 앓다가 화병(火病)이 난 사람을 본 적 있다. 나중에 들으니 배우자의 외도 문제가 있었다. 왜 그 당시에 말을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뭔지 모르겠더라고. 슬프고 억울하기도 한데, 그래도 내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욕하는 건 또 싫고. 바람피운 사람이랑 어떻게 계속 사느냐는 말 듣는 것도 싫고. 말하니까 속이 좀 시원해.”

그렇게 말한 뒤 커피를 한 입 머금는 표정은 생각보다 편안해 보였다. 안 좋은 일이 벌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 자신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감정이 그렇다. 어떠한 감정인지,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천천히 고민하고 밖으로 표출했을 때에야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요즘에는 에세이가 유행이다. 개인적인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공감받고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감정이나 기분을 말로 발화하는 행위는 타인을 설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걸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성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인하대학교병원 전공의
(전)수도군단 의무실장.아산정신병원.다사랑중앙병원 진료원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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