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이솝 우화 (6)

[정신의학신문 : 사당 숲 정신과, 최강록 전문의] 

 

 

 

위기일발과 기사회생은 종이 한 장 차이 – 늑대와 당나귀

당나귀 한 마리가 초원에서 마음껏 풀을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날씨도 좋고 풀은 싱싱했습니다. 그러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저만치서 사나운 늑대 한 마리가 자신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던 겁니다. 목이 콱 막혔습니다. 맛있던 풀이 소태처럼 쓰게 느껴졌습니다.

 

‘어쩐다? 도망가야 하나? 내가 늑대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는 사이 늑대는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당나귀는 온몸에 식은땀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이제는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 없었습니다. 공포에 휩싸여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겁니다. 일촉즉발의 위기였습니다.

 

‘그래.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어. 마음 단단히 먹자.’

 

당나귀는 꾀를 써서 위기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늑대를 보지 못한 채 태연히 풀을 뜯는 척했습니다. 바짝 다가온 늑대가 의아하다는 듯 당나귀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내가 다가오는데, 왜 달아나지 않는 거야? 무섭지 않아?”

 

잡아먹을 때 잡아먹더라도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늑대였습니다. 당나귀가 대답했습니다.

 

“물론 무섭지. 도망가고 싶고. 그런데 발에 큰 가시가 박혀서 도저히 도망갈 수가 없어.”

 

당나귀는 무척 측은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늑대는 도망갈 수 없다는 당나귀의 말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얼마만 한 가시가 박혔길래 그런 건지 궁금해졌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건데?”

“몰라. 너무 아파 발을 디딜 수가 없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난 네게 잡아먹힐 각오가 되어 있어. 하지만 그전에 내 발에 박힌 가시부터 좀 빼줘. 이걸 빼고 잡아먹어야 나중에 네 목에 가시가 걸리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네 목에 가시가 박혀 큰일 날 거야.”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늑대는 다 잡은 먹잇감인 당나귀의 발에서 큰 가시를 빼낸 다음 맛있게 당나귀를 잡아먹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고자 한 것입니다.

 

“어디야?”

“여기…… 아니, 좀 더 아래로 가까이 와봐. 그렇지, 거기.”

 

늑대는 당나귀가 쳐든 발굽에 머리를 가까이 대고 어디 가시가 박혔는지 두리번거렸습니다. 당나귀 발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늑대의 머리가 정조준되었습니다. 당나귀는 이때다 싶어, 있는 힘을 다해 발굽으로 늑대의 머리를 걷어찼습니다. 당나귀 발굽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늑대는 멀찌감치 날아가 즉사했습니다. 당나귀는 다시 여유롭게 풀을 뜯었습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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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상황에서 침착하게 꾀를 내 목숨을 구한 지혜로운 당나귀와 다 잡은 먹잇감을 놓친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잃은 어리석은 늑대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이야기입니다. 갑작스레 위기가 닥치면 누구나 당황하게 마련입니다. 평소 사려 깊고 냉철한 사람도 놀라고 다급해 어쩔 줄을 모릅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공포가 엄습합니다. 절망이 밀려옵니다. 어지간히 담력이 크고 배포가 두둑한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공포(恐怖, Fear)란 뭔가 괴로운 사태가 다가오는 걸 예감하거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다가왔을 때 일어나는 불쾌한 감정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반응입니다. 두려움과 무서움을 느끼는 것이죠. 실제로 괴로운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이런 감정과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불안(不安, Anxiety)입니다.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가다 보면 으스스합니다. 자꾸만 누가 따라오는 것 같고 어디선가 뭐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이런 게 불안입니다. 그러다가 실제로 치한이나 강도가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이때 생기는 감정과 반응이 공포입니다.

 

사나운 동물,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 뱀처럼 징그러운 생물을 보면 공포를 느낍니다. 머리를 풀어헤친 채 입에 피를 흘리며 서 있는 소복 입은 귀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상대방을 매섭게 쏘아보는 뱀파이어를 봐도 공포를 느끼죠. 지진으로 건물이 흔들린다거나 엘리베이터 안에 갇혔을 때도 공포를 경험합니다. 폭력과 범죄와 전쟁은 많은 사람을 공포에 빠뜨립니다. 이렇듯 누구나 느끼는 공포 말고도 개인적 체험으로 공포를 느끼기도 합니다. 조건반응에 의한 겁니다. 자전거나 다람쥐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남과 다른 무서운 체험을 한 탓에 성인이 되어서도 그 대상만 보면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런 공포감이 한번 형성되면 아무리 설득하고 타일러도 없애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공포는 뇌의 편도체(扁挑體, Amygdala)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편도체는 뇌의 측두엽 전방 안쪽에 위치하는 부위로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부위가 손상되면 공포 반응이 사라지거나 약해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쥐와 고양이는 어울릴 수 없는 상극입니다. 그런데 쥐의 편도체를 손상하면 고양이를 겁내지 않습니다. 공포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 부위에 전기 자극을 가하면 공포와 수반된 반응이 일어납니다. 방어적으로 행동하고, 자율신경이 변화하며, 피부 감각이 둔화하고, 호르몬이 과도하게 분비되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자극에 따라 점점 더 심한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생존과 안전이 위협을 받을 때 누구나 공포를 느낍니다. 이럴 때 두렵고 무서운 감정을 갖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특정한 사물이나 상황에 대해 극렬하게 계속해서 나타나는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를 정신의학에서는 공포증(恐怖症, Phobia)이라고 합니다. 특정한 대상과 상황에 직면하거나 그런 대상과 상황을 맞닥뜨릴 것이라 예견할 때, 현저하고 지속적이며 지나치게 비합리적인 두려움을 경험하는 겁니다. 넓은 곳이나 공개된 장소에만 가면 두려움이 찾아오는 광장 공포증(Agoraphobia), 높은 건물이나 산 등에 오르면 공포를 느끼는 고소공포증(Acrophobia), 엘리베이터나 비행기 같은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무섭고 떨리는 폐소공포증(Claustrophobia) 등입니다. 평소 말을 잘하다가 회의할 때나 프레젠테이션 할 때면 떨면서 말을 잇지 못하는 회의 공포증, 빛이 없는 어두운 곳에만 가면 공포가 엄습하는 어둠 공포증도 있습니다. 이는 불안장애의 일종입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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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증은 전문의와 상담한 후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어렸을 때 형성된 트라우마를 찾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불안 요소를 발견해 이겨내려 애를 쓰며, 공포 대상과 상황을 직면함으로써 순차적으로 비이성적인 두려움을 누그러뜨려야 합니다. 환자와 의사와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이 힘을 모으고 적절한 치료를 병행하면 시간이 걸려도 호전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포 그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위험과 위협이 닥쳐 자신의 생존과 안전이 흔들릴 때 공포를 느끼는 건 지극히 당연합니다. 공포를 느낄 때 사람들은 자신을 괴롭게 하는 대상과 상황으로부터 도피하거나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직면해서 이겨내거나 적절히 처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아무런 생각도 행동도 하지 못합니다. 생존과 안전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면서 깊은 좌절과 절망에 빠집니다. 이를 직면해서 이겨내거나 적절히 처리할 준비가 되어 있으려면 당면한 대상과 상황에 관해 충분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과거에 형성된 알맞은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이럴 경우, 공포를 느끼지 않거나 덜 느끼거나 짧은 시간 안에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공포는 자신의 생존과 안전이 위협받을 때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공포를 느꼈을 때 재빨리 자신의 생존과 안전에 전혀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면 공포가 사라지고 안심하게 될 겁니다. 무조건 도피하고 회피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공포를 느끼는 대상과 상황은 그대로니까요. 높은 곳에 올라가면 덜덜 떨리고 오금이 저린 것은 잘못해서 떨어지면 죽거나 다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맹수를 보면 무서워서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공격받으면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화점 엘리베이터를 타고 높이 올라가거나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를 보거나 아쿠아리움에 가서 상어를 맞닥뜨려도 두렵거나 무섭지 않고 아름답고 신기하게 느껴지는 건 생존과 안전에 일절 위협을 받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나귀에게 배울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위기 상황에서도 당나귀는 섣불리 도망하거나 모든 걸 포기한 채 잡아먹으라고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늑대의 행동을 주시하며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지킬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침착하게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겁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공포에 휩싸여 즉흥적으로 대처하거나 어설프게 행동하면 오히려 자신의 생존과 안전에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당나귀는 경거망동하지 않았습니다. 늑대를 물리칠 수 있는 자신만의 무기를 찾아냈습니다. 늑대에게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이 있다면 자신에게는 엄청난 괴력을 가진 발굽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발굽으로 늑대의 급소를 정조준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습니다. 당나귀는 자신의 지혜로 늑대가 자기 머리를 스스로 발굽에 들이밀도록 만들었습니다. 탁월한 위기 대처 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지혜롭게 위기를 탈출한 당나귀는 기분 좋게 잔뜩 풀을 뜯어 먹고 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런데 다음에 또 다른 늑대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때도 발굽에 가시가 박혔다는 속임수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또 다른 늑대도 지난번 늑대처럼 멍청하고 충동적이어야 합니다. 늑대들 사이에 지난번 늑대가 어떻게 죽었는지 소문이 나지도 않아야겠죠.

만약 늑대들 가운데 침착하고 꾀가 많은 늑대가 다가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나귀는 더 침착하고 더 이성적으로 늑대를 물리칠 묘수를 짜내야만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위협하는 대상이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전장치는 자기 자신이 발견하고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나는 결국 내가 지켜야 합니다.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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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언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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