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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드라마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편 바로가기] 

 

 

#과부하가 걸린 로봇

정의라는 인풋(Input) 값이 입력된 로봇, 황시목 검사는 거침없이 사건을 추리해나간다. 용의자를 직접 지목하고 심문하며 발 빠르게 수사를 지휘해나간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수월하게 해결되는 듯했던 사건은 오히려 조금씩 엉켜 들어간다. 흑막 뒤에 감춰진 거대한 음모는 황시목의 명쾌한 추리를 비웃듯 점점 더 꼬여만 간다. 그가 칼같이 추리해나갈수록 사건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그 음모는 급기야 황시목의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집어삼키며 그를 압박해간다. 묘하게 얽힌 관계였던 직속 후배 영은수의 죽음.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형제 같은 선배 서동재의 납치. 그 앞에서 우리의 로봇은 혼란스러워한다. 결국 그는 깨질듯한 두통과 이명을 경험하며 쓰러지고 만다.

무논리와 비이성의 감정 따위는 배제한 채 컴퓨터 같은 기억력과 관찰력으로 냉철하게 판단하는 주인공 앞에서 왜 사건은 풀리질 않는 것일까. 인풋과 아웃풋이 명료한 수식이 왜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마는 것일까.

 

#한여진 경위

로봇과도 같았던 황시목이 혼란스러워할 때, 사건이 조금씩 풀려가는 단초를 제공하는 데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한여진 경위다.

한여진은 황시목과 달리 즉흥적인 감정으로 불타는 인물이다. 물론 그녀 또한 황시목 못지않은 관찰력과 추리력을 발휘하며, 누구보다 강력한 직관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녀가 황시목과 가장 대비되는 지점은 역시 감정의 표현 여부이다. 한여진은 살해당한 박무성의 모친을 보고 측은지심에 자신의 옥탑방으로 데리고 오기도 하고, 뻔뻔한 용의자 앞에서는 분노로 폭발하며 잠시 분별력을 잃기도 한다.
 

황시목은 한여진과 수사를 공조해갈수록 조금씩 새로운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한여진과 함께할수록 꽉 막혀 있던 문제가 하나둘씩 실마리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한여진이 황시목에게는 없는 어떤 강력한 감정의 논리로 문제를 일사천리로 해결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여진의 감정적 면모에서 직접적으로 문제 해결의 직관이 샘솟는 것 또한 아니다. 한여진과 함께할수록 황시목이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감각이다.
 

사진_비밀의숲 한여진 경위(배두나)

 

#관계

황시목은 어린 시절 수술로 감정을 잃어버리며 타인과의 '관계' 또한 함께 잃어버렸다. 무언가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과 감정적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도 감정을 공유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저 공허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관계'라는 것은 분명 사람과 사람이 서로 그저 정보를 공유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관계는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과정이다. 관계는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가 또 다른 세계와 만나며 일어나는 모종의 화학반응이다. 우리는 이성으로 관계 맺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관계, 우리를 다른 누군가와 이어주는 관계의 끈은 분명 감정으로 공진한다.
 

황시목 검사가 한여진과 함께할수록, 그의 세계에는 관계라는 끈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한다. 그녀와 함께 있을수록 황시목은 지금까지 그저 같은 공간에 존재하기만 했을 뿐이던 인물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영은수와, 서동재와, 특임팀과, 동료들과 맺어가는 관계 속의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황시목은 이해하기 시작한다. 특임팀 멤버들 사이의 각별한 관계 속에서 윤 과장의 마음, 아들을 잃은 윤 과장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영은수와의 관계 속에서 영일재 장관의 두려움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서동재와의 관계 속에서 권력에 대한 탐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면서 그 마음들이 빚어낸 거대한 음모의 진실 속으로 한 발짝씩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된다. 결국 거대한 음모라는 것 또한 사람들의 욕망, 두려움, 분노, 우월감 같은 감정들로 쌓여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명석한 두뇌만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던 문제의 실마리가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Therapeutic Alliance

정신분석이 마음의 실마리를 더듬는 방법 역시 '관계'에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통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치료자와 환자 사이의 '전이 관계'라고 이야기했다.

전이(transference)란 환자가 살아오면서 경험해왔던 어떤 중요한 인간관계가 현재 치료자와의 관계에서 무의식적으로 덧씌워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반대로 역전이는 치료자가 자신의 경험 속 관계에 비추어 환자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전이와 역전이는 불가피할뿐더러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에서 환자와 치료자 사이의 관계(Therapeutic Alliance)는 단순히 분석 과정에서 맺어지는 부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성공적인 분석과 치료에 가장 필수적인 핵심 요소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서로를 향한 묵직한 감정들로 이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전이와 역전이가 일어난다는 것은 곧 서로가 상대방을 자신의 삶 속 가장 강렬했던 감정에 덧씌워 바라본다는 것이다. 각자의 인생으로 이루어진 두 세계가 마주치는 순간. 그 순간에서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열쇠를 찾을 수 있다. 그 순간이야말로 무논리와 비이성의 감정이 품고 있던 진정한 함의가 드러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역할

안토니오 다마지오(A. Damasio)라는 정신과 의사는 감정이 이성의 보조적 도구가 아니라, 근본적인 의사결정 주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오히려 인지기능이 의사결정을 사후판단하거나 해석하는 보조적 도구이며 근본적으로는 우리 모두 무의식적 감정에 따라 판단한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볼 때도 맹수 앞에서 도망치느냐 싸우느냐를 결정하는 생존의 결정은 본능적인 감정이 맡아야 한다.

하지만 감정은 비이성적이다. 이차 사고의 엄밀한 논리를 따르지 못하고 단순한 일차 사고에 의존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은 번번이 맹수를 맞닥뜨려야 하는 밀림 속이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복잡한 시뮬레이션을 거듭해야 하는 사회 속을 살아간다.

때문에 감정은 분명 방해물처럼 여겨질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감정 때문에 많은 일을 그르친다. 결정적인 순간에 냉정하지 못하고 감정에 휩싸여 행동했다가 후회한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현대 사회에서 감정의 근본적인 역할은 무언가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복잡하게 꼬인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오히려 복잡하게 무언가를 엮어낸다.

바로 관계를 통해 우리를 엮어낸다. 현대 사회는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관계로 엮여있고, 우리는 감정 없이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오직 공진하는 감정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만날 수 있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인 만큼 감정적인 동물이다. 너와 나의 관계없이 우리는 진실에 닿을 수 없다. 비밀의 숲을 열어주는 나침반은 이성만으로는 찾을 수 없다. 오직 관계를 통해 서로에 닿을 때 우리는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

 

#로봇의 미소

비밀의 숲은 어떻게 보면 황시목 검사의 성장드라마로 바라볼 수도 있다. 감정을 잃어버린 채 외톨이로 고군분투하던 로봇 황시목이 하나씩 진정한 동료를 만들어가게 되는 성장의 드라마 말이다. 비밀의 숲은 황시목이 하나씩 감정을 되찾고 관계를 되찾게 되는 성장 스토리이다.

그리고 그 우리는 그의 성장드라마를 보며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종잡을 수 없고 비합리적인 우리의 감정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이유는 바로 우리 곁의 누군가와의 관계가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의 곁에 '너'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너'를 느낄 수 있는 뜨거운 감정이 있다는 것을 새삼 돌이켜보게 된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양철 나무꾼은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기 위해 도로시 일행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결국 여행의 막바지에서 마법사 오즈에게 양철 심장을 받게 된다. 하지만 오즈의 마법사를 보는 누구나 나무꾼의 진정한 마음이 그 양철 심장 쪼가리에 담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사실 그의 진정한 마음, 그의 감정은 그가 도로시 일행과 함께 하는 관계 속에서 이미 모두 되찾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정의를 찾아가는 검찰의 치열한 싸움도, 환자의 무의식을 찾아가는 정신분석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두의 일상 속 고군분투도 마찬가지이다. 모두의 진실은 분명 우리의 곁에 누군가와 함께할 때, 누군가와의 진정한 관계에 불이 밝혀지는 순간 드러날 수 있다. 로봇이 환하게 미소 짓게 되는 기적과 같은 그 순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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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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