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환의 <시(詩)와 함께하는 마음공부> (2)

[정신의학신문 : 여의도 힐 정신과, 황인환 전문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 전반부입니다. 한국인이 가장 애송하는 시 중 하나죠. 1952년에 발표되었다가 이듬해 출간된 시집 『꽃의 소묘』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시가 쓰이고 발표된 시기가 참혹한 전쟁 기간 중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는 부분에 생각을 집중해보았습니다. 이름을 ‘잘’ 불러주어야겠죠. 여기에는 ‘잘 들여다봐야 한다’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에 대해 생각해보고, 무엇인지 정의해서, 이름을 불러주어야 할 겁니다. 

 

관계에서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는 이 관계가 모호해서는 안 되고, 어떤 관계인지 정의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잘 들여다본 후에 그에 맞는 이름을 붙여줘야겠죠. 모호한 관계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을뿐더러 안정되게 유지하기도 어렵습니다.

가족, 친구, 연인, 부부, 직장동료, 직장상사…… 이렇게 정의를 내린 다음,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그 정의에 맞는 기대를 해야 상처 받는 일을 줄일 수 있습니다.

친구 관계임에도 연인 관계에서나 있을 법한 무언가를 바람으로써 상처를 받고, 회사 상사임에도 고향 선후배 관계에서나 있을 법한 무언가를 바람으로써 상처를 받습니다.

먼저 관계를 정확히 정의하고, 그에 맞는 권리를 행사하며,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만, 관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라는 건 사실 간단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더 많습니다. 관계에 이름을 붙여주려면 시간을 써서 유심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들여다본다는 것은 가끔 힘들기도 합니다. 관계를 들여다본다는 건, 그 사람이 보는 내 모습도 들여다보아야 하니까요.

그래도 우리가 이 관계를 잘 끌고 가기 위해서는 피하지 않고, 들여다본 후에 그에 맞는 이름을 잘 붙여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무언가를 정의 내린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골똘히 들여다보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조금 더 생각을 확장해보면 이는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는 데에도 해당이 됩니다.
 

사진_픽셀


오스트리아 출생의 영국 철학자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서양철학사를 통틀어 언어에 대해 가장 철저하게 회의하고 분석한 철학자로 통합니다. 그는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고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내 세상은 내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만큼이다. 어떤 실체의 언어를 모른다면, 우리는 그것을 떠올릴 수조차 없다. 즉 내 세계에 없는 것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는 내가 인식할 수 없는 세계이고,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와 같다는 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명제와 김춘수의 시적 언어를 종합해보면 이런 말이 되지 않을까요? 

“내가 이름을 붙여주어야만, 마침내 내 세계가 된다.”

 

치료나 상담을 위해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하면 의사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기분을, 생각을 설명해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 기분은 무엇이었나요?”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마음이 어땠나요?”

우리는 모호하고 막연한 내 마음을, 이렇게 들여다보고 저렇게 살펴보아 힘겹게 말로 표현해봅니다.

“불편했어요.”
“힘들었습니다.”
“좋지 않았어요.”

이렇게 모호한 마음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그때 제 마음은 이랬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을 말로 정의하게 됩니다. 그게 무엇이었는지 이름과 의미를 부여해주게 되죠. 그전까지는 단지 불편하기만 했던 마음이 이제는 우울함, 슬픔, 화, 짜증, 속상함, 서운함, 자책 등으로 좀 더 분명하게 실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불편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본다는 것은 힘들지요.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고,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민할 수 있게 됩니다.

또 가끔은 불편해서 답답한 마음을,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내가 이해해주는 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요. 

 

이름을 잘 붙여준다는 것, 여기에는 잘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과정이 포함됩니다. 이처럼 고요한 상태에서 자세히 귀 기울여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거쳐, 우리는 그 실체를 이해하고 난 뒤, 비로소 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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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의도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마음은 괜찮냐고 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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