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픽사베이

첫 상담 시간에 아이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꼭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아빠가 제일 좋을 때?

아빠가 제일 싫을 때?

엄마가 제일 좋을 때?

엄마가 제일 싫을 때?

이 질문에 분명하고 구체적인 대답을 할 수 있는 아이는 비교적 부모와의 애착이 튼튼하고 자신의 감정 인식과 표현이 좋은 아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아이들이 “부모가 제일 좋을 때?”에 대한 대답은 못하더라도 “부모가 제일 싫을 때?”에 대한 대답은 명확하게 한다.

 

“아빠가 때렸을 때”, “엄마가 무서운 표정으로 화냈을 때” 등등.

 

부모님들은 이런 대답에 당황해 하면서 “1년 전에 딱 한 번 있었던 일인데...”이라고 억울해 한다.

아이들은 왜 나쁜 일을 오래 기억하는 것일까?

그 답은 뇌가 작동하는 기본원리인 생존지향성(survival orientation)에 있다.

 

뇌는 기본적으로 개체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진화해왔다. 그것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유일한 본능은 종족보존에 대한 욕구(자식에 대한 사랑) 정도다. 뇌는 생존을 위한 정보를 보존하기 위해 내부 및 외부적인 사건을 여러 가지 형태의 기억으로 남긴다. 기억의 형태에는 장기 기억, 단기 기억, 외현 기억, 암묵 기억이 있다.

뇌가 기억하는 과정은 컴퓨터 메모리에 저장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일단 신체 감각, 감정, 생각 등의 정보를 일시적인 단기 기억 형태로 받아들인다. 처음 듣는 전화번호를 버튼을 누를 때까지 단기적으로 기억하는 형태의 기억을 단기 기억이라고 한다. 단기 기억은 컴퓨터 문서 프로그램에서 컴퓨터 모니터에 글자를 입력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러한 단기 기억은 문서 프로그램에서 “저장”을 눌러 하드 메모리에 문서를 저장하듯이 1년 후든 10년 후든 다시 불러낼 수 있는 형태의 장기 기억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 있을 때만 장기 보존된다. 이 때 관여하는 것이 감정이다. 물론 반복도 관여한다.

뇌는 많은 정보들 중에 생존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정보를 더 보존, 기억하려고 애쓴다. 그 정보들의 가치를 매기는 척도가 감정이다. 감정은 마치 정신세계에서 가치를 표시하는 돈과 같다.

 

감정이 강하게 실린 정보가 가치 있는, 중요한 정보라고 여긴다.

그런 정보는 쉽게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다. 장기기억이 저장되는 해마 옆의 뇌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편도체(amygdala)가 공포와 같은 강한 감정 반응에 관여한다.

 

 

압도적인 상황에서 공포와 무력감을 느낄 때 (소위 멘탈붕괴, 멘붕이 오면) 뇌는 편도체를 활성화시키면서 감정이 고조되고 생존 모드로 전환이 된다. 그러면 그 상황은 고스란히 장기기억으로 저장된다. 호랑이에게 물려갈 뻔 한 후에는 그때 모든 것이 저절로 애쓰지 않아도 기억이 된다. 이것이 아이들이 나쁜 일을 오래 기억하는 이유다. 그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뇌가 판단해서이다.

 

그림 유진수 정신의학신문 기자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아이들은 왜 혼났는지 이유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왜 혼났는지 그 이유는 기억되지 못하고 그 당시 느꼈던 부모의 무서운 표정, 맞았을 때 통증, 무서웠던 감정만 자세하게 묘사한다. 부모가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이다.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정신적 충격에 대처할 수 있는 일반적인 심리방어기제가 아직 충분히 발전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쉽게 생존모드의 뇌 상태로 전환이 된다. 그 상태에서는 무엇을 잘못했나? 어떻게 하면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게 예방할 수 있을까?하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생각보다는 몸의 감각과 연결된 감정이 활성화된다. 생각뇌(전두엽)이 멈춰 서 버리고 감정뇌(편도체)가 활성화되어 그저 싸우거나 회피하거나 얼어붙어버리는 본능적인 반응만 일어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부모의 은혜는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게 공기처럼 아이들의 존재를 감싸고 보호한다. 아버지는 힘들게 고생하면서 일을 하여 가족들의 의식주를 해결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커리어를 희생하면서 가정주부가 되어 아이들을 돌보기도 하고, 워킹맘으로 일과 양육 모두를 감당하기도 한다. 한 부모 가정의 부모가 가지는 부담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밥 해먹이고 청소하고 빨래해서 쾌적한 환경에서 살게 해주는, 이러한 일상적인 은혜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 사건들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유감스럽게도.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잘못된 행동에 대해 적절한 좌절을 주고 혼내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아이들의 뇌는 이런 가끔 있는 자극적인 사건들만 잘 기억한다-억울하게도.

그러면 우리는 우리 뇌의 이러한 성향을 역이용해야 한다.

 

뇌는 좋은 강한 감정도 중요하게 여긴다. 일상적인 희생 봉사 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강한 좋은 감정을 일으키는 사건을 만들면 그것이 고스란히 기억된다. 그 좋은 기억, 추억은 나쁜 기억을 상쇄할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로부터 보호막이 되어 준다.

 

그러면 어떻게 강한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추억을 만들까?가 우리의 숙제가 된다.

어떤 외국 육아책에서 ‘디즈니랜드 아빠’라는 용어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는 평상시에는 육아에 전혀 동참하지 않다가 1년에 한 번 디즈니랜드에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책임을 다 한 듯이 행동하는 아빠를 빗대어 부정적인 어조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에라도 가고, 아니면 동네 놀이터에서라도 신나게 놀아주어서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는 아빠는 정말 훌륭한 아빠이다.

 

한 번 놀 때 정말 ‘하얗게 태워서’ 확실하게 한 방을 남기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꼭 외국이나 비싼 놀이 공원에 가는 것, 장난감을 사주는 것만이 아니라 돈 받고 일하듯이 집중해서 30분 정도 온전히 아이와 함께 호흡하면 놀아주는 것은 충분히 강한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장기기억에 보존된다. 몸으로 같이 움직이고 그림을 그리거나 블록을 쌓으면서 아이의 반응에 맞장구 쳐주고 눈을 맞추는 것은 강한 긍정적인 감정,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사랑은 눈으로 전해진다.

 

워킹맘의 경우에도 양육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연구 결과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이때 질(quality)를 어떻게 확보하는가? 무엇이 질 높은 육아인가?

 

간단하게는 우선 아이에게 폭언하지 않고 감정적 폭발을 하지 않는 것이다.

폭언과 감정적 폭발은 그동안 공들여 쌓아놓은 많은 것을 무너뜨린다. 너무 억울하게도. 그리고 그 기억은 아이는 두고두고 괴롭히고, 아이로 하여금 부모를 괴롭히게 만든다. 너무 손해 보는 장사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물론 쉽지 않지만.

 

또 하나의 전략은 가족만의 일상적으로 꾸준히 반복하는 이벤트, 의례(ritual)을 만드는 것이다.

 

자기 전에 침대에 함께 누워 책을 읽어주거나 출퇴근 시 아이랑 함께 하는 독특한 포옹 동작을 반복하는 것은 뇌에 새겨지는 안정감을 준다.

그 안정감이 바로 애착(attachment)이며, 자신감과 모든 긍정적 인간관계의 기초가 되는 믿음(basic trust)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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