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남자 친구/여자 친구가 바람을 피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헤어져야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민 없이 대답한다. 날 두고 다른 이성과 바람이 났다는 것은 사랑과 신뢰가 이미 무너졌다는 뜻이다. 사랑과 신뢰가 무너진 연애를 무엇하러 하겠는가. 헤어지면 된다. 당연한 대답이다.

 

애정관계는 본질적으로 배타성을 내포한다. 질투는 인간이 가진 몇 안 되는 근본감정 중 하나이다. 연인이 다른 사람과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심지어 본인이 바람을 피우는 와중에도 바람 상대가 또 다른 누군가와 바람을 피우면 분노하게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바람은 누구에게나 충격이며, 고통이다. 때문에 연인이 날 두고 바람을 피웠다는 것은 나를 배신한 것뿐 아니라 나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이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이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이라면 답은 정해져 있다. 이별이다. 바람은 곧 이별로 가는 직행 티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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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막상 실제의 연인들을 보다 보면, 그렇게 명쾌하지만은 않다. "너 바람피웠어? 우리 헤어져!"라고 당연하게만 이어질 것 같은 연애의 공식이 모두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저는 상대방이 바람 좀 피워도 괜찮아요."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너무도 복잡하게 얽히게 마련이라,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게 되면 스스로의 마음이 그렇게 쉽게 정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상대의 배신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 관계를 쉽사리 포기하지 못할 수 있다. 바람피우는 상대방과 헤어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날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냐'며 분노하면서도 상대방을 놓지 못한다. 상대를 용서하고 싶어 하지만 결국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그 모순된 마음 때문에 고통받는다. 분노와 부질없는 용서가 되풀이된다. 모순됨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헤어지면 그만'이라는 아주 쉽고 간단한 해결책이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분명 우리 곁에는 그런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슬픈 패턴은 상대의 바람을 발견하는 순간에서 출발한다. 당연히 그 순간에는 분노와 배신감이 폭발한다. 당연히 이별을 선언한다. 하지만 막상 상대방이 납작 엎드리며 사과할 때, 처음 연애하던 때의 그때처럼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할 때면 마음이 조금씩 흔들릴 수 있다. 잠시간 눈이 멀었었노라고,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거라며 다짐하는 말에 희망을 엿볼 수 도 있다. 어쩌면 이 난관을 계기로 둘의 사랑이 더 단단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결국 어찌어찌 용서하고 없던 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결코 쉽게 잊히지 않는다. 기억의 트라우마가 되어 끊임없이 되살아나며 불화를 일으킨다. 크고 작은 다툼이 반복된다. 그리고 상대의 바람이 재발하기라도 하면, 분노와 사과, 다짐과 용서, 이별과 재회가 반복된다.

어느 순간부터 바람을 피운 상대방은 오히려 다툼의 책임을 거꾸로 뒤집어 씌우기 시작한다. 너무 예민하고 의심한다며, 사람을 너무 구속한다고 비난한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말한다. 되려 이별을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헤어질 수 없다. 이렇게 헤어지면 정말 다 내 탓이 될 것만 같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불안하다. 당당하게 바람을 인정하고 비난의 말을 쏟아내는 상대방을 바라보며, 언제부터 관계가 이렇게 속수무책이 되었는지 좌절한다. 그저 관계가 다시 예전의 좋았던 그때로 되돌아가기만을 헛되이 바라며 신음한다. 패턴은 그렇게 반복된다.

 

연인 사이라는 관계에는 묘하게 이중적인 면모가 있다. 서로 다른 사람과는 애정관계를 갖지 않겠다고 맺는 약속의 특성 때문에 바로 그러하다. 그 약속은 아주 강력하게 서로를 구속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느 한순간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서로를 사랑하는 동안에는 무엇보다 강한 효력을 가지지만, 사실 결혼만큼 강력한 법적 효력을 갖지는 못한다.

약속은 지켜지고 있을 때까지만 약속이다. 어느 한 사람이 깨어버리면 그걸로 그만이다. 데이트폭력처럼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없다. 연인 이외의 사람과는 절대로 연애하지 못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언제든 연인 이외의 사람과 연애할 수도 있는 상황. 그 모호한 약속의 이중성이 모든 연애의 불안감 속 근원에 항상 도사리고 있다.

그 얄팍하고 허약한 약속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주춧돌은 다름 아닌 '믿음'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애초에 별다른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무 근거 없이 그냥 받아들이기로 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며, 연인 간의 사랑도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 깨졌다는 가장 직접적인 근거가 바로 바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그렇게 믿음과 약속이 깨진 관계가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며 결국 파탄에 이르고 마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어떤 이들은 용서하지도 용서하지 않은 것도 아닌, 화해한 것도 화해하지 않은 것도 아닌 관계를 짊어진 채,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괴로워하는 것일까. 왜 남들이 조언해주듯, 단칼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미 회복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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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게 본다면야 여러 가지 개인의 정신역동적 배경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관계를 망가트리는 표면적인 원인 중 하나는 제대로 갈무리되지 못한 '혼란'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의 혼란'이 '관계의 혼란'으로 옮겨져 왔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바람은 너무나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비극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는 상대방을 오로지 미워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바람을 피운 상대방은 너무나 밉고 증오스럽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그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신뢰의 약속을 한 사람이었다. 혼란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사랑과 증오라는 정 반대의 감정이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혼란일 수밖에 없다.

 

애착과 증오가 뒤섞인 감정은 혼란스럽다. 사랑과 증오는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는 감정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무의식적으로 그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고 느낀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감정을 다루는 능력이 약화되어 있을 때에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멜라니 클라인(M. Klein)이 말했듯, 분열적(Splitting)인 생각이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모 아니면 도'로 갈라놓기 때문이다. 공존할 수 없는 감정을 동시에 느낄 때 우리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때 몇몇 가해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이러한 혼란을 조금씩 관계의 혼란으로 전이시킨다. 바람피운 상대에 대한 감정이 증오와 애착 사이를 오가며 불안정하게 널뛰는 것처럼, 연인 관계가 악화와 회복을 반복하며 극과 극으로 널뛰도록 만든다.

그렇게 감정의 요동이 고스란히 관계의 요동으로 이어지고 만다. 그러면서 그 진폭은 더욱 커지고 파장은 짧아진다. 결국 요동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혼란과 자책만이 남는다. 내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이 관계가 망가진 것만 같다는 잘못된 자책이 남는다. 바로 그 혼란과 자책으로 인해 병적인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고 비틀비틀 이어간다.

 

사람들은 연인의 바람에 대한 분노에 쉽게 공감한다. 마치 자기 일처럼 분노해준다. 당장에 그런 녀석과 헤어져버리라고 대신 화를 내준다.

하지만 바람피운 상대에게 아직 남아있는 긍정적인 감정을 공감해주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상대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애틋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그 모호한 감정은 쉽게 지지받지 못한다. 오히려, 바람난 인간에게 무슨 미련을 갖느냐고 타박을 듣는 일이 더욱 많다. 피해자는 절대로 상대에게 긍정적인 마음을 품을 수 없는 것처럼 이해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의 감정은 그렇게 스위치를 조작하듯 한 순간에 뒤바뀌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감정은 고정된 어느 한 가지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에 대한 감정은 일상의 군데군데에 묻어있다. 함께 했던 장소와 함께 했던 사람, 함께한 시간, 음식, 기억, 음악, 물건 등 모든 곳에 조금씩 묻은 채로 여기저기 산재해있다.

그 모든 파편들을 일순간에 카드 뒤집듯 바꾸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여전히 과거의 긍정적인 감정들은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배신, 그 갑작스러운 비극 이후에도 애착이 남아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람피운 연인 뒤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모순된 감정에 대한 포용이다. 혼란이 자연스러운 상황임을, 갈팡질팡하지 못하는 마음이 정상적임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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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트라우마'는 분석적으로 볼 때, '상실'로 이해된다. 트라우마 이전의 나를 상실한다는 뜻이다. 상대에게 배신당했을 때의 트라우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분명 상실이다. 이전의 관계에 대한 상실, 이제는 예전의 신뢰 관계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상실의 아픔이다. 내가 믿던 그 사람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는 상실의 아픔이다. 그들을 대할 때에 근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점이 바로 이 사실이다. 그들은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다. 

 

무언가를 상실한다는 아픔에는 충분한 애도와 적응의 기간이 필요하다. 연인의 배신이나 가해 역시 마찬가지이다. 갑작스러운 사건 뒤에 닥친 상실의 아픔과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분명 시간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혼란을 충분히 수용해 줄 수 있는 누군가이다. 혼란을 받아들이고 그 상실의 고통을 슬퍼하고 스스로 이해할 수 있기 위한 주변의 이해와 포용이다. 

때문에 이 문제를 당장에 끊어 버리라고 종용하는 것도, 일단 용서하고 없던 일처럼 잊어버리라고 종용하는 것도 모두 불가능한 요구이다. 그래서는 불가피한 혼란에 헛되이 맞서려 애쓰다 지쳐 쓰러질 밖에 없다. 필요하다면 전문가의 도움과 상담을 통해서라도 아픔과 마주하기 위한 시간이 절실하다. 상처 받은 스스로의 마음을 온전히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했었고, 지금도 사랑한다는 사실과 그가 지금은 나를 저버렸다는 사실. 배우자가 증오스러우면서도 미련스럽게 애틋하다는 감정. 함께 존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모순된 사실과 감정들의 공존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무너져가는 '관계'에서 '나'를 건져낼 수 있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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