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는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이 어둠 속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가만히 있다 보니, 내가 그동안 눈에 보이는 것들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폭력을 당할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느끼지 않아도 되는 곳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여름, 그 섬에서』저자 다이애나 마컴(Diana Marcum)은 자신이 살던 캘리포니아를 떠나 아조레스 섬에 도착해 머무는 동안 책을 집필하면서 휴식이란 무엇인가 회고하는 본인의 생각을 이렇게 전합니다. 마컴이 느낀 평온함은 철학자 나탈리 크나프의 말처럼 ‘휴식은 자신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장소에 이르는 것’일지 모릅니다.
 

사진_픽셀


누구에게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장소 하나쯤은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꼭 거창한 여행지가 아니더라도 차 한 잔으로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로운 카페나 젊은 시절 방황으로 가득했어도 흐뭇하게 청춘의 시간을 되돌아볼 수 있는 번잡한 골목길이 특별한 것은 그곳에서 느꼈던 기억들 때문일 것입니다. 소중한 장소는 나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듯 애착을 가지는 장소도 있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강박적으로 피하는 장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식사가 끝난 지 오래여도 부엌에 가면 온갖 식기들을 모두 씻고 정리하는 데에 반나절을 보내는 사람이나 화장실에서 샤워를 몇 시간이나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상은 물론 같이 사는 가족들에게까지 방해를 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살림살이를 완벽하게 정돈해야 가정에서 자리와 역할을 인정받는 것 같다’, ‘화장실을 가지 않게 되면(또는 가게 되면) 내게 큰일이 날 것 같다’와 같은 생각이 불안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정 장소에 극심한 불안함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 꼭 있어야 안심이 되고,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청결과 정리정돈에 강박적으로 생각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강박적인 성향이 있으신 분들은 생각에 의미부여를 크게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사고 때문에 한 가지 사고에 꽂혀 버리고 나면 헤어 나오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 중 실제로 DSM-5에는 공중화장실공포증(paruresis)이라는 증후군이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사회공포증의 하나로 공중화장실에서 타인을 의식하면 아예 화장실을 가지 않으려고 하고 화장실에 가기 두려워 물도 마시지 않는 증상을 보입니다. 이 증상은 전 세계적으로 2억 2천만 명이 겪고 있을 정도로 흔합니다.

과거 필자가 만났던 한 초등학생 아이는 학교에서 화장실을 들춰보는 친구들에게 놀림당한 경험 때문에 화장실을 가지 않겠다고 털어놨습니다. 그 아이는 ‘더럽다’, ‘창피하다’와 같은 생각을 화장실과 연결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경험 때문에 화장실은 도저히 가기 힘든, 불편한 장소가 돼버렸습니다. 이렇듯 강박적인 성향, 과거에 겪었던 트라우마가 함께 현재의 사고방식을 바꿔버리고 불편함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불안과 강박을 느끼지 않으려 항상 그 장소에 머물거나 또는 그곳을 무작정 피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물론 현실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특정 장소에 부여한 불안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이 해결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왜 이렇게 화장실에 집착하는가?’, ‘나는 왜 화장실에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는가’, 그리고 화장실이 아예 없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물어보는 겁니다. 이렇게 꼬리를 물고 질문을 이어가다 보면 자신이 상황 자체를 비약해서 생각하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건강하지 않은, 왜곡된 생각들이 그 사이에 숨어 있다면, 이를 건강한 시각으로 조망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장실을 당장 찾지 못한다면 좀 과장해서 최악의 경우 소변 좀 지린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아무 일 없다는 생각으로 확장시켜 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만큼의 편함이 당장 있지 않아도 큰 문제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아프지만 아프리카』여행기의 작가 정움은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기도문화를 보며 ‘어디든 발을 씻고 카펫을 깔면 메카는 가까워진다’고 전합니다. 그들에게는 꼭 메카가 바로 발 디딜 수 있는 곳에 있지 않더라도 기도로써 마음의 평온과 진실한 순간을 느낄 수 있다면 그곳이 메카라는 겁니다.

이렇듯 진정 마음의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곳은 꼭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찾아낸 평온의 지점일 것입니다. 마음의 불안을 피하기 외부로 시선을 돌리기보다는 모든 일은 내 예상과 다르게 일어날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삶의 불안을 무릅쓰는 용기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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