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 : 니콜라이 2세 대관식

 

병적인 의존은 보호 받고 싶어 하는 지나친 욕구로 인해, 자아로 하여금 스스로를 복종적으로 만들고, 상대방에게 매달리도록 만든다. 병적인 의존을 통해 자아를 지켜내고자 하게 된 이들은, 자신의 욕구가 곧 타인의 욕구로 결정된다. 지지에 대한 상실의 두려움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책임과 결정의 몫을 모두 타인에게 떠맡기도록 하여 하염없이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왜곡된 인간관계에 집착하고 몰두하게 만든다.

 

과도하고 병리적인 의존성의 핵심에는 사실 대상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상실’로 대변되는 과거의 외상적 경험의 재현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스스로를 무력화 시켜버린 자아의 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상실해 버린 애정의 대상과 연결되기 위해 자아는 대상을 찾아 헤매고, 다른 존재로 전치된 그 의존의 대상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무력해진 자아의 모든 책임과 권한을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된다. 복종을 통해 대상과 자신을 묶어두려 한다. 심지어 무조건적으로 양도되는 그 책임과 권한이 왕권에 비견할 막대한 권력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뒤에는 당시 황실을 지배하던 알렉산드라 황후가 있었다. 당시 극도로 혼란스럽던 정국에서 니콜라이 2세와 황후가 유일하게 의지하고 아끼던 존재는 슬하 1남 4녀의 자녀들이었다. 더욱이, 혈우병을 가지고 태어났던 아들 알렉세이는 그들이 유독 깊은 애정으로 보살피던 존재였다. 어린 시절 조부 알렉산드르 2세의 비극적인 죽음과 함께 황태자가 되었던 니콜라이 황제가 가장 두려워 한 것은 다름 아닌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 아들 알렉세이의 상실이었을 것이다. 혈우병을 앓는 아들에 대한 상실의 두려움은 의존과 보호 받고 싶음의 욕구로 행동화되었고, 그 대상은 아들의 병을 고쳐주겠다던 ‘라스푸틴’이라는 요사스러운 승려로 전치되었다. 황제와 황후의 두려움과 의존은 결국 러시아 제정 역사의 마지막 장의 주도권마저 그 정체가 불분명한 신흥종교의 요승(妖僧)에게 넘겨주고야 말았다.

타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 뿐 아니라, 그보다 수백년도 더 이전인 우리 고려의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에서도 역시 괴이한 종교인에 대한 왕권의 의존이라는 유사한 형태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끔찍이도 사랑하던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의 슬픔과 신돈에 대한 병적인 의존은 고려 왕조의 전복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다고들 말하곤 한다. 이미 몰락해가는 고려 왕조를 특유의 개혁적이고 추진력 있는 정치로 중흥시키고자 하였던 공민왕이었지만, 격동의 세월 속에 왕좌에 앉은 한명의 인격체로서 그 모든 풍파를 홀로 오롯이 견뎌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그에게 꿈속에서 현신한 인물인 신돈이 나타났고, 그 결과 공민왕 역시 모호한 신분의 번뜩이는 승려에게로 왕권을 떠넘기는 역사의 비극을 반복하였던 것이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국가들의 역사가 보여주었듯 말이다.

 

수많은 국민들의 인생이 작은 결정 하나하나에 송두리째 휘청 일 수 있는 ‘국정’이라는 막중한 권한을, 요사스러운 승려나 무녀의 발언권 아래에 둔다는 비상식적인 역사의 비극적인 드라마들 뒤에는, 왕좌에 앉은 채로 수없이 상처 받고 지쳐버린 가련한 영혼들이 있었다. 거대한 무리를 통솔하고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 주는 무거운 책임에 더해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 마저 모두 빼앗길 수밖에 없는 운명에 지쳐버린 영혼들이 있었다. 더 이상 상실하고 싶지 않아 자신의 모든 것-그것이 국가라 할지라도-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자아를 붙들어야 했던 서글프고 외로운 운명들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들은 결국 사회의 엄청난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비극적 경험과 정신적 고통을 단순한 연민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기에는, 그들이 짊어져야만 했던 책임과 의무의 무게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국가의 안위를 좌우하는 왕관의 무게는 개인의 상처와 정신적 좌절마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역사와 대중에게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 것이다.

개인의 상처는 이해 받고 위로 받을 수 있다. 상처 받지 않으려, 버림받지 않으려 저지른 행동이 자신과 주변을 파멸로 몰고 간다 하더라도, 진정한 치유는 그 외로움에 대한 이해의 손길에서 시작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그로 인해 야기되는 타인의 상처와 상실에 대한 책임마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진정으로 이해 받고 위로 받기 위해서는 막중한 과오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우선되어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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