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20대 후반 여자입니다. 제 고민은, 심한 무기력감이에요.

저는 스무 살 때부터 급격히 무기력해졌어요. 십 대 때는 그냥 또래보단 인생에 대해 비관적인 편이었고요. 대학교에 들어가 수업을 등록해놓고도 결석하고, 학교 갈 준비를 다 해놓고 침대로 뛰어들어 자 버리고… 학사경고와 제적을 당해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았어요.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을 알면서도요. 

그러다 열심히 해보자 싶어 노력해보면 올에이를 받고 장학금도 받았었지만 이내 다시 무기력해져서 학점을 죽 쒀먹기 일쑤였어요. 이러한 순환을 반복하다 지난 5월, 졸업했습니다. 물론 내놓기 부끄러운 학점으로요. 그래도 제가 이루고픈 꿈이 있어서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대학원 입학시험을 잘 준비하다가 다시… 무기력함에 빠져서 현재 5개월 동안 집에 틀어박혀 살고 있어요.

가족들은 제가 아주 열심히 시험 준비하는 줄 알고 계세요. 실상 저는 앉아서 문제집을 열어볼 에너지도 의지도 없는데 말이죠. 제 생각엔 무기력함이 반복되고 성취감을 못 느끼다 보니 우울해지는 거 같습니다. 성취감을 느끼고픈데 무기력함을 못 이겨 하루하루를 침대 안에서 보내니까요. 그저 밤이 기다려져요. 죄책감 없이 잠이 들어도 되는 시간이라서요.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 글을 쓰다 보니 두서없이 주절댔네요. 예전엔 머리가 빨리빨리 돌아간 거 같은데 요샌 멍하고 바보가 된 느낌이라 이 글을 쓰는데도 몇 번이나 고쳐 썼어요.

졸업 학기 때쯤 무기력함과 우울감이 심해져서 상담을 받았었어요. 불안증과 우울증을 진단받았고 렉사프로 10mg를 처방받았어요. 부작용이 자살이라길래 겁이 나서 안 먹고 있다가 지난 한 달간 우울감이 더욱더 심해지고 자살 충동도 들어서 4일 전부터 복용하고 있습니다. 상담 치료도 병행해야 좋다고 알고 있지만, 더 안 좋아진 제 정신상태를 보고 상담사님께서 뭐라 하실지 걱정이 돼서 상담 세션에 가기 주저가 되네요. 상담하는 것이 부담되고요. 한심하지만 저는 그런 걱정을 해요.

상담치료 없이 약만으로 이 “병”이 나아질까요? 상담하지 않고 약만 먹는 것으로도, 굳이 예전에 좋지 않은 기억을 짜내고, 머리 쓰며 고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울증이 좋아지면 좋겠어요. 

 

사진_픽사베이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두형입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적 약물은, 여러 심리적 불편함을 야기하는 생물학적 요인을 교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세로토닌, 도파민, 아드레날린 등의 물질이 기분, 불안 같은 심리적 증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이러한 물질들을 신경전달물질이라 하며, 뇌 속에서 여러 부위에 작용하며 여러 심리적 현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신경전달물질에 불균형이 발생하면 우울, 불안 등 여러 정신의학적 증상이 초래될 수 있고, 약물치료는 이러한 불균형의 해소를 통해 불편한 마음의 증상을 호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약물만으로는 치료가 충분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모든 의학의 궁극적 목적은 환자가 원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이러한 경향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정신과 의사는 단순히 환자가 불편해하는 심리적 증상의 생물학적 호전을 넘어, 그의 삶, 그가 살아갈 방향을 함께 고민합니다. 질환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마음의 어려움(증상이나 병이란 표현 대신, 마음의 어려움이란 표현을 사용하겠습니다.)은 삶이 행복하지 않은 원인일 수도 있고, 행복하지 않은 삶의 결과일 수도 있으며, 또한 삶과 마음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합니다. 글쓴이님이 경험하시는 마음의 어려움 역시, 적어주신 대로 오래도록 삶과 상호작용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경험하는 마음의 증상, 마음의 어려움을 다루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그러한 삶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어떻게 행복할지입니다. 비록 지금 마음의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더라도, 차츰차츰 살아가고 싶은 모습으로 다가간다면 점차 마음도 편해질 것입니다. 반대로 약물을 비롯한 생물학적 치료를 통해 마음의 어려움을 잘 해결하였더라도, 삶의 방향이 내가 원치 않는 곳을 향하고 있다면 다시금 마음이 힘들어질 가능성이 크겠지요. 

우리의 목표는 우울이라는 마음의 어려움을 제거하는 것이라기보다,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과도한 우울이라는 증상은 불편하기에, 이에 효과가 있는 약물을 통해 조절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증상의 치료뿐 아니라 과거의 고민, 가치, 행복, 살아가고 싶은 모습, 이에 다가갈 방법 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다면, 증상의 호전, 재발 방지를 넘어 스스로가 원하는 행복에 다가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비롯한 정신보건 인력은 이러한 면담을 위해 전문적인 수련을 거친 이들입니다. 또한, 내담자에 대한 면담은 상대방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도움이 적절할지를 결정하고 이를 전해드리기 위한 과정이며, 면담실을 찾는 이들의 마음이 힘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말씀 주신 증상을 미루어 보건대, 현재는 정신건강의학과적 약물치료와 상담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상태로 보이며, 담당 주치의 선생님과 면담 치료 계획에 대해서도 상의를 드려 보시기를 권고드립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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