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광화문숲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염태성]

 

대학병원 전공의 시절에 자살 시도한 환자들을 면담하고 평가지를 작성하면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대상자에 대한 추정진단의 선택지 중에 ‘없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해당 평가지에서는 모든 자살 시도한 사람들에 대해 특정 종류의 정신질환이 있음을 애초부터 규정하고 있었다.

과거 철학 윤리학 시간에 인간은 자유의지의 존재라고 배웠고, 현대사회에서도 타인에게 해가 되는 것 이외의 대부분 행위들은 법적으로 제한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왜 정신과에서는 자살시도를 항상 병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치료해야 할 증상의 일종으로 보는 것일까?

 

대한민국 정신보건법에 따르면 정신과적 증상을 보이는 환자라도 절대다수는 스스로 치료를 받을지 말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 스스로가 치료를 원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는 환자의 정신병적 증상이 심해서 자해 혹은 타해의 위험성이 큰 상태이다. 인권문제를 고려하여 몇 년 전 강제입원 및 치료에 대한 법의 개편이 있었지만, 이러한 적응증은 바뀌지 않았다.

세계 현대의학의 이정표가 되는 미국 정신과학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는 입원절차에 판사가 관여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다르지만, 강제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의 기준은 한국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만약 자살을 시도하고 실패한 후에 응급실로 실려 가게 되면, 과거 정신과 치료병력이 없고 스스로가 치료를 원치 않더라도(몇 가지 절차가 통과되면) 강제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로 규정된다.

 

각종 종교와 철학, 과학 사상에서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과 이론을 내놓고 있으나,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음을 부정하는 입장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지를 거부하는 자살이라는 행위는 이상행동으로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인간이 언제부터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를 시작해 왔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문명이 시작되기 이전에 자살이 있었다면 아마 생존과 직결된,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렵고 자연재해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긴 절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양문명의 기원이 되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자살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삶이 힘들어 스스로 죽음을 택한 노예들이나 전쟁 혹은 정치싸움에서 패배한 집권층의 자살이 주로 있었던 것 같다.

이후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살에 대한 연구는 위의 예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4세기 무렵부터 인간이 중심이 되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개인의 행동에 대한 다방면의 분석이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진_픽셀

 

이처럼 일종의 일탈로만 생각되었던 자살이라는 행위를 처음으로 사회학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프랑스의 학자 에밀 뒤르켐이다. 그는 1897년 발행한 저서 '자살론'에서, 처음으로 자살에 대한 역학적 연구를 수행하였고 자살과 관련 있는 여러 사회적 요소들을 분석하였다. 또한, 동기에 의한 자살의 종류를 분류함으로써 향후 학자들의 연구에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물론 방법론적인 한계를 포함한 여러 측면에서 뒤르켐의 연구는 비판받아 왔으며 현대의 시점과 맞지 않는 가정도 많다. 특히 그는 정신질환에 의한 자살과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자살을 철저하게 분리해서 설명했는데, 현대 정신의학의 입장에서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분류라 볼 수 있다. 요즘 시대에는 많은 정신질환들이 사회적 요소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와의 불화나 왕따 문제, 성인이 되어서는 직장 관련 스트레스와 각종 인간관계, 또 그 이후에는 사회 보장 시스템의 부재로 인한 소외감의 영향 등 현대사회의 자살과 정신질환의 문제는 사회적 요소와의 직접적 연관성이 크다.

 

19세기 실존주의 철학의 도래와 함께 인생 그 자체에 대한 고찰이 연구의 주가 되면서 ‘삶이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더욱 사상가들의 주된 테마로 떠오르게 된다.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알베르 카뮈는 저서 ‘시지프의 신화’에서 인생의 부조리함에 대해 역설하며, 삶의 제일 중요한 선택은 자살, 즉 인생이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영향인지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자살이 하나의 예술적인 문화현상의 일부로 인식되고 있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낭만주의 시대 이후 각종 분야의 천재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수도 없이 들어왔다. 화가 반 고흐는 스스로 귀를 자르고 가슴에 총을 쏘았고, 수학자 앨런 튜링은 처지를 비관하여 독이 든 사과를 깨물었다.

이후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노출된 각종 유명인들의 자살사례들은 셀 수도 없을 지경이다. 사람들의 자살에 대한 인식변화는 왕년의 락스타인 커트 코베인이 죽기 전 남겼다는, ‘서서히 사라지기보다는 한 번에 불타 없어지는 것이 낫다.’라는 문구가 말해주는 듯하다.

 

다시 의학의 관점으로 돌아가보면, 결국 모든 병의 가장 심각한 합병증은 환자의 사망이다. 암이 무섭고 고혈압, 당뇨의 관리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사람의 생명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우울증, 조울증, 조현병 등의 정신질환 역시 사람의 기대수명을 줄인다는 연구결과들이 많다. 그 원인으로는 심혈관질환 발생률의 증가, 정신질환으로 인해 늘어나는 흡연 및 음주의 영향 등이 추정되고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살률의 증가일 것이다.

선행연구는 없지만 각종 정신질환들이 기대수명을 줄이는 정도는 그 질병의 자살률이 얼마나 높은지와 어느 정도 비례관계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정신질환과 기대수명과 관련된 연구는, 알코올 같은 물질사용장애를 제외하면, 우울증, 조울증, 조현병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 세 질환은 자살률이 높은 대표적인 정신질환들이다. 

 

결국 논란의 핵심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존재론적인 자살이 존재한다면, 이를 병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치료해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온전한 이성적 판단으로 충분히 고민해 본 후에 목숨을 끊기로 결정한 사람은 스스로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는 몇 가지 쟁점 요소들이 있다. 우선 현재의 법이나 사상체계로는 이러한 종류의 결정을 검증할 수 있는 전문가 혹은 사회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 사람의 현재 의사결정이 자신의 신념에 의한 것인지, 혹은 정신질환이나 스트레스로 인해 판단이 흐려진 상태에 의한 것인지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이와 연관되어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자살시도는 충동적인 행동이라는 사실이다. 자살시도 후 실패한 환자들을 응급실에서 본 기억을 돌이켜보면, 절반 이상의 환자들은 의식을 회복한 그 순간부터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하였고, 나머지 사람들 중 대부분 역시 며칠 동안의 치료를 받고 안정이 되면 비슷한 생각의 변화를 보였다. 

 

현재 일부 국가에서는 안락사 허용이 큰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시간이 더 흐르면 언젠가는 불치병이나 병으로 인한 통증 이외에도, 자신의 신념에 의해서 스스로의 생명을 포기하는 행위가 합법이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되더라도 과정은 매우 엄정한 절차를 거쳐서 진행될 것이고 현재의 안락사와는 비교되지 않을 반대와 논란에 부딪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지는 지금의 의료 체계보다 더 나은 대안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존재론적 자살을 걸러내는 제도가 부재하는 것이 현대 정신의학의 잘못이라기보다는, 한정된 자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의학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시스템상의 최선의 선택이라고 보는 쪽이 옳은 것 같다. 결국, 도덕이든 사상이든 심지어 지금은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들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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