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조현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러분은 친구를 만나면 무엇을 하시나요? 같이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갈 수도 있겠지만 함께 밥을 먹고 맥주 한잔 하면서 각자 힘들었던 일들에 대해 하소연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때 대개는 친구의 하소연에 진심으로 공감하며 위로를 해주실 겁니다. 하지만 일관되지 않은 내용으로 과장되게 하소연하는 친구라면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맞닥뜨려 힘들어하는 A 씨의 사례를 들어볼까요?

 

A 씨는 대학 친구 B 씨와 퇴근길에 한 번씩 만나 저녁을 먹으며 하루를 정리합니다. 방송작가인 B 씨는 방송계의 흥미로운 뒷이야기들을 재미있게 전달해주었습니다. 하지만 A 씨는 어느 순간부터 B 씨를 만나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B 씨는 어느 날은 “출연자 C 씨는 성격이 정말 최고다”라고 했다가 다음에 만났을 때는 C 씨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습니다. 같이 일하는 PD에 대해서도 리더십 있다고 했다가 며칠 뒤엔 원색적으로 비난했습니다. A 씨가 보기엔 함께 일하는 동료 작가들과의 갈등도 심해 보였습니다. B 씨는 자기 일에 대해서도 ‘천직’이라며 좋아하다가 “정말 못해먹겠다. 때려치울 것이다.”라고 분노했습니다.

A 씨를 더 고민하게 만든 것은 B 씨가 주량 넘게 폭음한 뒤 A 씨에게 “외롭고 허무하다.”라고 하소연한다는 점이었습니다. B 씨는 비싼 명품을 지른 뒤 카드값을 메우느라 힘들어하기도 했습니다. A 씨는 감정기복이 심하고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친구 B 씨를 볼 때마다 걱정이 됐습니다. B 씨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기도 했지만 “내 편은 아무도 없고 너도 날 이해 못해.”라는 답만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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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씨에게 B 씨가 보이는 반응들을 살펴봤을 때 여러분도 B 씨가 마치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조마조마해 보이지 않으신가요? B 씨가 만약 치료를 위해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한다면 ‘경계성 성격장애’가 의심된다고 진단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영화나 드라마 주인공이 간혹 이러한 모습으로 등장해 ‘경계성 성격장애’는 성격장애 중에선 가장 잘 알려져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경계성 인격장애의 DSM 진단기준은 이렇습니다. 광범위한 양상의 대인관계, 자기상 및 정서의 불안정과 극심한 충동성이 초기 성인기에 시작해 여러 영역에서 지속되며, 다음 중 적어도 5가지 이상을 동반합니다.

1. 실제로 혹은 상상으로 버림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함
2. 대인관계가 불안정하여 자주 이상화와 평가절하 사이를 왔다갔다함
3. 정체성 장애: 자아상이나 자기감이 지속적으로 왜곡되거나 불안정함
4. 위험성이 있는 다음의 2가지 영역에서 충동성을 나타냄 (낭비, 난잡한 성생활, 물질남용, 부주의한 운전, 과식 등)
5. 자살 행동, 제스처, 위협, 혹은 자해 행동이 반복됨
6. 정서의 반응성이 현저하여 나타나는 정서적 불안정
7. 만성적 공허감
8. 부적절하며 강렬한 분노 혹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함
9. 일시적이며 스트레스와 연관이 되는 편집적 사고, 심한 해리 증상

 

A 씨가 B 씨에 대해 종잡을 수 없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주위 모든 사람을 선한 사람, 악한 사람으로 나눠 이분법적으로 평가하고, 동일한 사람에 대해서도 평가가 자주 바뀌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방어기제를 분열(splitting)이라고 부르며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소아기에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어딘가에 존재하며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심리적 상태를 ‘대상 항상성’이라고 지칭합니다. 마가렛 말러(Margaret Mahler)에 따르면 ‘대상 항상성’은 동일한 대상에 대해 사랑하는 감정과 적개심을 함께 느끼고 인지하며 이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으로도 설명합니다.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는 소아기 때 ‘대상 항상성’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엄마가 보이지 않게 되면 매우 두려워하고, 엄마에 대해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통합시킬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인이 되어서도 이별과 외로움을 견딜 수 없게 되고 동일한 사람을 이상화시켰다가 갑자기 평가절하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B 씨의 행동 중에 가장 우려되는 것은 폭음을 자주 하고, 충동적인 소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겠지요. 다행히 B 씨에게는 나타나진 않았지만,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는 자신이 버림받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떠나지 못하게 자해 행동이나 위협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자들이 이런 행동을 보였을 경우엔 자신과 타인의 안전을 위해 입원치료를 부득이하게 고려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경계성 성격장애’가 개선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치료과정이 순탄하진 않지만 환자가 치료에 잘 동참하면 개선될 수 있습니다. 약물치료와 정신치료를 잘 병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나 공격성을 보일 땐 항정신병약물, 우울한 기분이 나타날 땐 항우울제 복용을 하면 효과가 있습니다. 기분 안정제를 복용하면 전반적인 기능이 향상된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치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가 치료자와 치료적 동맹을 맺고 꾸준히 정신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려면 환자와 치료자 모두 지난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환자가 정신치료를 받을 때 여러 가지 부적응적인 방어기제를 쓰거나 감정 표현을 하기 때문에 치료자도 치료과정에서 매우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환자가 치료자에 대한 불만으로 치료를 중단해 버리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역경(?)을 딛고 꾸준히 치료가 진행되면 환자가 대인관계에서 나타나는 어려움을 덜 겪게 되고, 어느 정도 안정된 일상생활이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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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씨의 사례로 돌아가 볼까요? 과연 A 씨는 친구 B 씨에게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을까요? B 씨에게 ‘너의 태도가 일관성이 없고 문제가 있다. 네가 많이 바뀌어야 한다. 너랑 만나는 게 피곤하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B 씨는 극심한 분노나 절망적인 감정을 표현할 가능성이 높고, 친구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극도의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숙련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도 이들 환자를 대하는 게 쉽지 않은 마당에 친구가 조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난감한 일입니다.

 

환자가 겪고 있는 우울한 감정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해주고 조심스럽게 ‘네가 많이 힘들어 보여서 친구로서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아. 정신과 상담이나 치료를 받아보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정도의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가 이런 문제로 인해 고민이 깊으시면, 폴 T. 메이슨과 랜디 크리거가 지은 ‘잡았다 네가 술래야’라는 책을 추천해 드립니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남자 친구를 경험한 저자와,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와 가족들을 많이 치료한 경험이 있는 또 다른 저자의 기록이어서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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