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조성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부분 정신과를 찾아오시는 분들은 명확한 이유를 가지고 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신과에 오는 것은 대단한 용기나 동기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힘들다고 하면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은 '의지로 이겨내야지' '정신과 약 먹으면 중독된다. 못 끊어' '정신과 가면 너 나중에 취업할 때 문제 된다' 등의 갖은 훼방을 놓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변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신과에 오신 분들은 명확한 이유를 가지고 옵니다. 그것은 잠을 못 자는 것도 있고, 우울해서 죽고 싶어서이기도 하며, 무엇인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가끔, 큰 이유 없이 내원하시는 분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냥 와봤어요. 내가 괜찮은지 알고 싶어요."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왔어요."

​저에게 이런 이야기들은 어렵게 느껴집니다. 명확한 증상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증상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사진_픽사베이


프로이트는 증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타협 형성(compromise formation)'이라고 했습니다.

타협 형성은 초자아(superego), 자아(ego), 욕동(id)의 세 주체는 각각의 원하는 바가 다르며, 여기서 나오는 '갈등'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보면, 욕동(id)은 어머니를 혼자 독차지하고 싶은 욕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자아(superego)는 법과 도덕은 아버지를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며, 어머니를 독차지하는 것은 패륜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합니다. 둘의 갈등이 심해지면, 내가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날 죽이려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죠.

이제 자아(ego)가 나서서 중재를 합니다. "아버지는 무섭고도 좋은 사람이야. 나중에 아버지처럼 좋은 사람이 되어야 어머니 같은 여자를 만나지.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복종하고 그에게서 배워야 해"라고 하는 것이죠. 이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인해서 아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그의 정체성을 닮기 위해 노력한다고 합니다.

증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자신이 처한 현실에 따르기로 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유가 없이 늘 몸 여기저기가 아픈 중년의 대상자는 자신의 걱정거리는 배우자가 자신을 (정서적 혹은 신체적) 학대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배우자는 참 나쁜 사람입니다. 집안일도 하지 않고, 다른 이성과 놀아나며,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기 일쑤입니다. 너무나 벗어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런 경우 해답은 명확합니다. 자신을 학대하는 배우자에게서 벗어나는 것이죠. 하지만 대상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대신 신체의 통증은 점점 심해질 뿐입니다.

사실 대상자는 홀로서기를 하기 두렵습니다. 자신을 학대하는 배우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 사람이 없이는 (경제적, 신체적, 감정적) 홀로서기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몸이 아픈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 경험으로 인해 무엇인가를 얻게 됩니다.

대상자는 이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이 아프기를 선택하며 이러한 신체 통증은 배우자를 괴롭히는 방식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벌주기이기도 합니다. 증상은 이런 식으로 소망과 현실과의 적절한 타협이기도 합니다.

이런 형태의 증상에 대한 공식을 정신역동적 공식(psychodynamic formulation)이라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는 대상자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정신역동적 공식을 쓰기 시작하고 그 공식이 맞는지 틀린지 면담을 해보기도 하며, 이렇게 저렇게 시험을 해보며, 점차 정신역동적 공식을 수정해 갑니다.

어찌 보면 답은 교과서 같이 정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세요."라는 것이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도 있으며, 그 이유가 불분명할 때는 그 이유를 찾아가며 그 이유를 알게 해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도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쩔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 그 이유를 존중하고 그저 지켜보는 때도 있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명확한 증상이 없이, 내원하시는 분들 혹은 한번 체크하기 위해 온 분들과 면담을 하면서 이런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명확한 증상이 없지만 병원에 왔다는 것도 무엇인가 병원으로 이끌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런 이유에 대해 정신과적 면담을 하고 심리 검사를 시행하여 무엇인가 찾아내기도 합니다.

"당신은 검사나 면담 시 000 상태라고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소견이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당신의 &&&&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 치료를 받아보시길 권유드립니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경우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시 병원을 찾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한편으로는 허탈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분들은 아직 임계치에 다다른 증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아직 내적인 갈등이 그리 심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내적인 갈등이 없이는 변화할 필요성도 느끼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요즘은 저도 그냥 열린 결말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힘들어지면 그때 다시 오세요."라고 말입니다.

나중에라도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줬었지'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정신과에 오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만약 나중에라도 정말 '증상'이 생긴다면, 그것은 갈등이 임계치에 다다른 것이고, 그것은 그냥 넘기기는 어려운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증상이 생기면 편하게 찾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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