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서한 강남 푸른 정신과 원장]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40대의 주부입니다. 전 지금 내 정체성은 과연 어디 있는가 하는 고민에 빠져 있어요. 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춘기도 아니고 뭐냐’며 핀잔만 주더라고요. 그런데 저에게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 남편은 굉장히 무뚝뚝해요. 그리고 가부장적이라서 회사 일에만 집중하는 타입이지요. 그래서 저는 일찌감치 일을 그만두고 제 사랑하는 아이 둘을 양육하는 데 매달렸습니다. 말 그대로 올인한 거죠.

주변 사람들이 볼 때 조금 유별나다 생각할 정도로 아이들이 먹는 것, 생활하는 것 전반을 신경 썼어요. 마치 그게 내 직업인 것처럼요.

아이들을 어린이집, 학교에 보내 놓고 나면 다른 엄마들은 취미 생활도 하고 모여서 수다도 떨고 하던데, 저는 그게 잘 안돼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혹시 선생님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건 아닐까, 밥은 잘 먹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요.

자칫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그런 불안감은 더욱 심해져요. 어린이집, 학교는 분명 안전한 곳일 텐데 말이죠. 학교가 바로 코 앞인데도 아이를 꼬박꼬박 데리러 가야 하고, 조금이라도 시간이 늦으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해요. 

 

생각해보면 이런 성향은 제 어머니를 닮은 것 같기도 해요. 어머니는 늘 나에게 ‘위험하니 밖에 돌아다니지 마라’, ‘밖에 나가서 사람, 차 조심해라’, ‘어두우면 밖에 혼자서는 절대로 나가지 마라’는 말을 매일같이 하셨거든요.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셨고, 제가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케어를 해주었어요.

나는 과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인데, 반대로 과잉보호를 받기도 한 것 같네요. 아이에게는 사랑을 주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머니는 좀 더 특별한 분이셨어요. 

 

저는 늘 아이들이 걱정됩니다. 거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요샌 TV만 봐도 온갖 범죄자들이 있는 세상인데, 위험하진 않을까…

그러면서도 제 삶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아이들에게 매달리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아이들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인지 회의감도 들고요.

 

저는 뭐가 문제일까요?

어디서부터 바뀌어야 할까요?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강남역 푸른 정신과 원장 서한입니다. 때아닌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계시는군요.

질문자님께서도 어렴풋이 짐작하셨듯, 현재 아이들에게 ‘올인’하는 성향은 대를 이어 내려온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봤어요.

단순히 어머니의 딸이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나, 상대방, 세상,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을 스키마(schema)라고 하는데, 이런 스키마의 씨앗은 어린 시절의 중요한 대상들과의 관계 경험에서부터 비롯하거든요.

질문자님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는 기저에는 불안, 염려와 같은 감정이 도사리고 있어요. 내가 헌신하지 않으면 아이가 다칠 것 같고, 무엇인가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나는 위험에 잘 대처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은 아이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자신도 모르게 학습한 탓이겠지요. 아이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내면서 성장하니까요. 그러니 스키마는 대물림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기저에 있는 불안감은 아이를 케어하는 수준을 넘어 과잉보호하게 만듭니다. 자라나는 아이는 부모의 품에서 점차 자율성을 획득하며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하도록 도와야 하지만, 과잉보호는 결국 둥지를 떠나지 못하게 붙들어 놓게 되는 것이지요.

혼자 설 힘을 키우지 못하는 아이는 세상이 두려워집니다. 그런 과정에서 나의 스키마는 다시 아이들에게 대물림됩니다. 세상엔 위험한 일이 너무 많고, 자신은 거기 대처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는 느낌. 그야말로 세상에 벌거벗겨진 채 내던져진 것 같은 불안을 은연중에 아이에게 심어줄지도 모릅니다.

 

아이와 부모, 양자의 관계에 약간의 거리감은 필요합니다. 헌신을 가장한 필요 이상의 보호는 부모 자신의 존재감을 희석시키기도 하지요.

지금 질문자님께서 느끼는 것처럼 아이에게 ‘올인’하다 보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밀착된 관계는 떼어내기 힘들어 아이의 독립 이후에 ‘빈 둥지 증후군’이 생기는 경우도 부지기수이지요.

 

자신의 취약성의 스키마를 아이들에게 그대로 물려주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아이에게 필요 이상의 것들을 해주려 하는 순간에 자신의 마음 안을 들여다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의 가능성을 조금은 현실적으로, 합리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대개 취약성의 스키마에서 떠오르는 사건들은 근거 없는, 혹은 매우 가능성이 희박하거든요.

‘걱정 목록’을 만들어 직접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손으로 직접 써 보는 것은 감정의 영역에 이성의 합리를 깃들게 하거든요. 

 

그러면서 자신을 위한 건강하고 즐거운 활동을 늘려가시길 바랍니다. 아이에게 헌신하며 잃어버렸던 많은 활동, 나만을 위한 즐거움을 조금씩 찾아가셔야 합니다. 부모가 건강하다면, 아이 또한 저절로 건강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건 당연하겠지요.

이 모든 과정을 혼자 하기 힘들다면, 옆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겠습니다. 

부디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멀리서 질문자님을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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