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첫 잔은 건강을 위해서요, 둘째 잔은 쾌락을 위해서요, 셋째 잔은 방종을 위해서요, 넷째 잔은 광기를 위해서다” -아나카르시스

 

굳이 그리스 철학자 아나카르시스(Anacharsis)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지나친 음주가 가져다주는 폐해를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술의 첫 잔은 늘 즐거운 법이다. 우리는 술이 몸에 들어오는 순간 긴장이 풀리고 그날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잊히는 느낌을 잘 알고 있다. 마치 술은 망각의 묘약처럼 안 좋은 기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술이 오히려 기억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결과를 발표한 과학자들이 있다. 어쩌면 황당할 수도 있는 이 주장은 2017년 영국 엑서터 대학의(University of Exeter) 한 연구팀에게서 나왔다.
 

사진_픽셀


연구팀은 88명의, 18세에서 53세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실험 참가자들을 모집했다. 실험은 총 이틀 동안 진행되었는데 실험 첫째 날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일련의 무의미한 단어들을 외우도록 학습시켰다.

여기서 단어들은 완전히 무의미한 단어는 아니었고 나중에 힌트를 주면 기억을 할 수 있을 법한 단어들을 학습시켰다. 예를 들면 “Doglk”라는 단어는 힌트로 작용하는 “Dog”라는 부분과 “lk”라는 무의미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학습이 끝난 후 연구팀은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뒤 한 그룹에게는 알코올을, 다른 그룹에게는 무알코올음료를 제공했다. 술을 제공받은 그룹은 당일 실험이 끝나고 집에 귀가해서도 술을 마시게끔 허용하였으며 반대로 술을 마시지 않은 그룹은 끝까지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다. 다음날 참가자들은 다시 연구소로 돌아와 전날 학습한 단어들에 대한 기억력 테스트를 거쳤다.

 

결과는 놀라웠다. 전날 술을 마시지 않았던 참가자들보다 술을 마신 참가자들이 기억력 테스트 점수가 더 높게 나온 것이다. 심지어 술을 더 많이 마신 사람일수록 점수가 더 높게 나오는 현상이 관찰되었다(참고로, 참가자들의 평균 알코올 섭취는 약 80ml 정도였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우선 두 가지 개념에 대해 소개를 하고자 한다. 하나는 선행성 기억 손상(anterograde memory impairment)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의 후행적 촉진(retrograde facilitation)이다. 우리가 술을 거하게 마시고 난 다음에는 기억을 잘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알코올의 작용으로 뇌로 들어온 새로운 정보의 통합이 잘 안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행성 기억 손상이다.

그러나 새로운 정보를 이전에 학습하고 술을 마시게 되면 알코올 섭취 시점부터 다음날 깨어나 기억력 테스트를 받기까지 뇌는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은 것과 같다. 술에 취했을 때 뇌에서는 새로운 정보의 통합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므로 술을 마시기 이전에 학습한 기억에 대한 간섭 현상이 현저히 줄어든다. 때문에 전날 술을 마셨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기억의 간섭이 있었던 무알코올 참가자들보다 더 잘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부터 공부를 할 때마다 옆에 맥주 캔을 두고 해야 할까? 아쉽게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우선 참가자들은 모두 수면을 취한 후 기억력 테스트를 거쳤다. 우리가 수면을 취할 때 기억이 통합되기도 하므로 수면이 끼치는 효과도 고려해야만 한다.

또 다른 이유로는 과연 알코올 섭취만이 경감된 기억의 간섭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이것이 향상된 기억력에 기여하느냐이다. 2012년 듀어 박사(Michaela Dewar)와 그의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일주일 후 얼마나 기억하는지 테스트를 했다.

이야기를 듣고 10분간 눈을 감고 아무 생각 없이 휴식을 한 실험 참가자들은 같은 시간 동안 다른 일에 열중한 참가자들보다 일주일 후 이야기를 더 잘 기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순한 휴식 또한 새로운 정보의 통합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기억의 간섭을 줄여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카르시스의 명언을 연장하여 술의 다섯째 잔은 기억력 향상을 위한다는 결론보다도 기억 형성에 방해가 요소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편이 더 적절한 결론이겠다.

 

참고 

* Improved memory for information learnt before alcohol use in social drinkers tested in a naturalistic setting
https://www.nature.com/articles/s41598-017-06305-w

* One Key to Having a Good Memory? Knowing When to Rest
https://www.psychologytoday.com/intl/blog/choke/201208/one-key-having-good-memory-knowing-when-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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