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장재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그동안 다녔던 병원들마다 진단명을 다르게 이야기하던데 도대체 확실한 진단명이 뭡니까?” 진료실에서 종종 받는 질문입니다. 이렇듯 정신과 의사들마다 진단을 다르게 이야기하면 환자분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도 있으실 텐데요. 이번에는 정신건강의학과 진단의 불확실성에 대해 이야기를 좀 드려볼까 합니다.

우선 내과나 한의원 같은 곳에서 '신경이다' 또는 '화(anger)다' 라며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는 경우는 정확한 정신과 진단명을 이야기했다기보다는 스트레스성 증상에 대해 환자분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솔직히 내과 의사나 한의사가 정신과 진단의 국제 분류체계에 대해 정확히 몰라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을 뭐라 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내과 등 타과의 진단명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니까요.

하지만 정신과 병원을 갔는데도 어느 병원에서는 불안장애라 했는데 다른 곳에서는 공황장애의 기미가 있다는 식으로 들었다 하시기도 합니다. 뭐, 이처럼 동일 카테고리 안의 다른 질환에 대해 병명을 달리 이야기하는 경우는 그럴 수도 있다고 칩시다. 하지만 어떤 병원에서는 조현병이라고 했는데 다른 병원에서는 조울증이라고 했다는 식으로, 아예 큰 카테고리가 다른 질병인데도 정신과 전문의마다 다르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꽤 자주 있습니다. 같은 교육과 훈련을 받은 정신과 의사들이 내리는 진단이 왜 이렇게 들쑥날쑥하고 일관성이 없을까요?
 

사진_픽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건강의학과의 진단체계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내과, 외과 같은 다른 전문과의 진단은 증상의 '원인'에 따라 진단이 됩니다. 예를 들어 비슷하게 기침과 열이 나도 원인균에 따라 감기일 수도 있고, 폐렴이나 또는 폐결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같은 소화불량 증상이라도 원인을 찾아보면 위암이나 대장암일 수도 있지만 과민성 대장 증상일 수도 있고 역류성 식도염일 수 있지요. 하지만 정신과 영역의 질환들은 그 원인들이 아직 잘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특징적인 증상들의 군에 따라 진단을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우울증의 진단기준을 한번 볼까요?

 

<주요 우울장애의 진단기준>

미국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가 2013년 개정한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 제5판(DSM-5)에 따른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A. 특징적 증상

다음의 증상 가운데 5가지(또는 그 이상)가 2주 연속으로 지속되며 이전의 기능 상태와 비교할 때 변화를 보이는 경우, 증상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1) 우울 기분이거나 (2) 흥미나 즐거움의 상실이어야 한다.

(1) 하루 중 대부분 그리고 거의 매일 지속되는 우울 기분에 대해 주관적으로 보고(예, 슬픔, 공허함 또는 절망감)하거나 객관적으로 관찰됨(예, 눈물 흘림) (주의점: 아동, 청소년의 경우는 과민한 기분으로 나타나기도 함)
(2) 거의 매일, 하루 중 대부분, 거의 또는 모든 일상 활동에 대해 흥미나 즐거움이 뚜렷하게 저하됨.
(3) 체중 조절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의미 있는 체중의 감소(예, 1개월 동안 5% 이상의 체중변화)나 체중의 증가, 거의 매일 나타나는 식욕의 감소나 증가가 있음(주의점: 아동에서는 체중 증가가 기대치에 미달되는 경우)
(4) 거의 매일 나타나는 불면이나 과다수면
(5) 거의 매일 나타나는 정신운동 초조나 지연(객관적으로 관찰 가능함, 단지 주관적인 좌불안석 혹은 처지는 느낌뿐만이 아님)
(6) 거의 매일 나타나는 피로나 활력의 상실
(7) 거의 매일 무가치감 또는 과도하거나 부적절한 죄책감(망상적일 수도 있는)을 느낌(단순히 병이 있다는데 대한 자책이나 죄책감이 아님)
(8) 거의 매일 나타나는 사고력이나 집중력의 감소, 또는 우유부단함(주관적인 호소나 객관적인 관찰 가능함)
(9) 반복적인 죽음에 대한 생각(단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님), 구체적인 계획 없이 반복되는 자살사고, 또는 자살시도나 자살 수행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B. 증상이 사회적, 직업적, 또는 다른 중요한 기능 영역에서 임상적으로 현저한 고통이나 손상을 초래한다.

C. 삽화가 물질의 생리적 효과나 다른 의학적 상태로 인한 것이 아니다.
주의점: 진단기준 A부터 C까지는 주요우울 삽화를 구성하고 있다.
주의점: 중요한 상실(예: 사별, 재정적 파탄, 자연재해로 인한 상실, 심각한 질병이나 장애)에 대한 반응으로 진단기준 A에 기술된 극도의 슬픔, 상실에 대한 반추, 불면, 식욕 저하, 그리고 체중의 감소가 나타날 수 있고 이는 우울 삽화와 유사하다. 비록 그러한 증상이 이해될 만하고 상실에 대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할지라도 정상적인 상실 반응 동안에 주요우울 삽화가 존재한다면 이는 주의 깊게 다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과거력과 상실의 고통을 표현하는 각 문화적 특징을 근거로 한 임상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D. 주요우울 삽화가 조현정동장애, 조현병, 조형양상장애, 망상장애, 달리 명시된 또는 명시되지 않은 조현병 스펙트럼 및 기타 정신병적 장애로 더 잘 설명되지 않는다.

E. 조증 삽화 혹은 경조증 삽화가 존재한 적이 없다.
주의점: 조증 유사 혹은 경조증 유사 삽화가 물질로 인한 것이나 다른 의학적 상태의 직접적인 생리적 효과로 인한 경우라면 이 제외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좀 복잡하지만 미국정신의학회의 진단기준(DSM-5)에 있는 그대로 옮겨봤습니다. 이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맞습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우울증마저 그 원인에 따른 진단이 아니라 '무슨 무슨 증상들 중에 몇 가지가 어느 기간 동안 있고 이러저러한 상황이 아니면 그 경우를 우울증이라고 하자'라는 식으로 진단기준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기침이라는 증상으로 비유를 해보자면 '일주일에 3일을 하루에 큰기침 5번 이상 잔기침 10번 이상을 하고, 열은 하루에 38도 이상 발열이 1주일에 4일 이상 나면 결핵이라고 하자'라는 식입니다. 

그렇게 듣고 보니 좀 황당하지요? 이렇듯 정신과 진단을 내리는 방식은 타과와 확연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원인을 정확히 모르니 발현하는 증상의 군에 따라 진단을 내리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불확실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증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꾸 변하거든요. 또한 증상의 유무, 빈도, 심한 정도라는 것이 ‘모 아니면 도’식으로 명확할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스펙트럼으로 생각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정신과 질환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뇌의 질환인데 뇌의 병증이 생기는 영역이 딱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뇌신경계에 각 사람마다 다르게 병이 오는 것이므로 증상 또한 구별이 모호하고 복잡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렇듯 정신질환에서 나타나는 증상은 너무 다양하고 변화무쌍해서 진단명을 구분할 때 세부기준에 따라 그 하위 진단을 자세히 구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전문의들조차도 헷갈릴 정도로 구분이 쉽지가 않죠. 즉, 증상의 양상이 변하여 몇 달 전에는 우울증이라 보였던 증상이 지금은 조울증처럼 바뀔 수도 하고 예전에는 망상장애처럼 보였던 증상이 현재는 조현병처럼 바뀌어 보이기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진찰한 그 시점에 환자가 호소하는 주된 증상에 따라서, 또는 보호자가 강조해서 이야기하는 증상에 따라서, 심지어는 증상이 모호할 때는 의사의 주된 관심이나 경험에 따라서도 방문하는 병원마다 다른 진단명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단이 이렇게 모호하고 전문가들도 의견이 다를 수 있는데 치료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먼저 바른 진단이 내려져야 바른 치료가 이루어지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이 부분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확한 진단명이 무엇이든 간에 치료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니까요. 환자를 진단에 따라 대략적으로 구분할 수야 있겠지만 깊이 살펴보면 어차피 각 사람은 각자 고유의 증상을 가진 유니크한 존재잖아요. 그러므로 치료는 각 사람의 고유함에 맞추어 하는 것이지 진단명에 따라 크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진단의 큰 줄기에 따라서 치료의 대원칙은 있지만요.

환자입장에서는 자신의 정확한 진단명을 알고 싶고 진단이 바로 되어야 정확한 치료가 이루어질 거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는 대체로 맞는 말이지만 정신과에서는 꼭 맞는 말은 아닐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유로 진단 자체가 유동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사람을 진단명으로 구분하기보다는 고유한 특성을 가진 그 사람 자체로 보려 노력합니다. 각 사람은 사람마다 모두 각각의 특징이 있는 고유한 존재이므로 굳이 카테고리화하려고 하기보다 그 사람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치료에도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단이 다르다고 치료가 생판 달라질 거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신과의 약물치료는 어차피 진단에 따른 치료가 아닌 증상에 대한 대증치료이며, 정신과의 상담치료는 진단명이 아니라 개개인의 고유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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