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강남 푸른 정신과 원장]

 

관계와 플라세보 효과 (placebo effect)

플라세보(placebo, 위약)란, 라틴어로 ‘내가 즐겁게 해 줄게요.’라는 뜻으로, 환자에게 의학적 치료법으로 이용되지만 실제로는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가짜 약제를 말한다. 어찌 보면, 병으로 신음하는 환자에게 전혀 사용할 필요가 없는, 혹은 의료윤리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될 ‘몹쓸 짓’을 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위약의 위력은 예상보다 강력하다.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 위약 효과)란, 위약을 진짜 치료 약으로 알고 사용했던 환자에게 나타나는 치료 효과를 뜻한다. 새로 개발된 신약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한 대규모의 연구에서도, 비슷한 계통에 속하는 약물들에 대한 비교와 더불어, 약물과 모양과 냄새, 크기가 같은 위약에 대한 비교가 빠지지 않는다.

놀라운 것은, 이 위약과 실제 약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가장 많이 처방되는 약 중의 하나인 항우울제의 효과를 입증하는 연구들에서도 위약과의 비교가 포함되며,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진짜’ 항우울제의 효과는 위약의 효과에 견줘 그리 압도적이지는 않다. 실제 약물의 효과가 부족하다는 해석보다는, 약물의 전달이 이루어지는 환경과 배경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반응 때문이라는 설명이 더 타당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뇌가 정신과 신체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거대하다고 볼 수 있다. 병과 약물의 상관관계에서 시선을 조금 넓혀 본다면, 우리의 삶에도 수많은 플라세보 효과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플라세보 효과가 미치는 영향력은 꽤 강력하다. 즉, 관계에서 우리가 인식 가능한 실제적인 상호작용 이상으로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던 기저에 자리 잡은 ‘밑바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올법한 한 장면을 그려보자. 한 인물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글썽이고 힘들어하고 있다. 옆에 앉은 연인이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다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 힘내. 네 잘못이 아니야.”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는 이들은 상투적으로 이어지는 위로의 말에 진부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저런 ‘식상한’ 말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 자신이 이와 같은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해 보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믿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좌절에 빠져 힘들어하는 나를 안아주며 저런 말을 해 준다면 어떨까? 그 말이 설령 닭살이 돋을 정도로 진부할지언정,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믿음, 몸과 마음으로 느껴지는 마음의 온기는 그 순간의 좌절과 슬픔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위로를 건네는 표현들 때문이 아닌, 상대와 쌓아왔던 신뢰와 사랑 때문이다.
 

사진_픽사베이


플라세보 효과와 뇌와 신체의 반응

관계의 순간에 마음에서, 더 정확하게는 대뇌에서 연결된 회로들에서 변화하는 것들이 관계의 플라세보 효과를 만들어낸다. 관계에서의 플라세보 효과는, 상대 혹은 환경에 의해 유도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결과에 대한 무의식적 예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은 사랑이 담긴 접촉이나 긍정적인 감정을 예상할 경우와 동일하게 보상체계의 활성화를 유발한다. 투약에 대한 구체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뇌는 긍정적인 효과를 만들어 낼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Coan 등이 시행한 연구에서, 한 여성이 위기의 상황에서 남편의 손을 잡게 되자 당연하게도 두려움의 신체 반응이 완화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두려움의 반응 완화는 여성이 남편과 얼마나 친밀한지, 그리고 손의 접촉 외에 진정시키는 얼굴 표정이나 감정의 조율 정도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상호작용도 중요하지만, 그 배경과 바탕 또한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심리치료 장면에서의 플라세보 효과

힘든 마음을 안고 방문하게 되는 심리치료의 현장에서도, 플라세보 효과는 은밀하게 나타난다. 정신분석이든, 인지행동치료(CBT)든, 사이코 드라마든, 기법과 대상을 막론하고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치료자가 내담자에 대해, 그리고 내담자가 치료자에 대해 가지는 인간적인 신뢰이다. 이를 치료적 관계(therapeutic relationship)라고 하며, 대부분의 심리치료는 치료 초기에 관계의 탑을 조금씩 쌓아 올리는 데 주력하게 된다. 치료에서 플라세보 효과가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결국 치료의 효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서로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일종의 ‘분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치료의 절정에서 내담자에게 통찰을 안겨줄 수 있는 한 마디가, 치료의 초기 국면에서는 치료 관계를 흐트러뜨릴 수 있는 위협이 되기도 한다.

인간 중심 치료(person-centerd therapy)를 주창한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ogers)는 따뜻함, 수용, 돌봄, 그리고 무조건적인 존중이 이러한 바탕을 만들어 줄 것이라 이야기했다. 심리치료의 장면은 내담자가 경험한 과거의 여러 관계가 치료자와 내담자의 교류 안에서 끊임없이 재현되는 스크린이며, 다양한 결의 상호작용이 오가는 관계의 정수(精髓)다. 이러한 점에서, 플라세보 효과는 심리치료의 필수요소일지도 모른다.

 

플라세보 효과는 관계의 MSG

관계에서의 플라세보 효과를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요컨대, 서로에게 오고 가는 말과 메시지 이상으로 비언어적 표현 혹은 관계에 대한 무의식적인 바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같은 말을 주고받더라도 서로가 쌓아 왔던 유대감의 깊이는 의미를 전혀 다르게 만들어버린다. 상대와 관계에서 고전한다면, 지금껏 진심이 담긴 바탕을 쌓아 올리는 것이 부족하지 않았나 돌아볼 필요가 있다. 관계에 있어 ‘진정한’ 플라세보 효과를 내고 싶다면, 그리고 상대와 ‘진정한’ 관계를 맺고 싶다면 서로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가 충분히 무르익어는 시간과 경험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힘들어하는 상대에게 구체적인 말과 행동, 무엇인가를 해 주려는 노력보다는 어깨를 툭 치며 함께 하늘을 바라보고 한 숨을 쉬는 것과 같은 비언어적 공감이 관계의 부족한 부분을 더 잘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관계의 결을 더욱 다채롭고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관계의 ‘MSG’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 문헌

정신치료의 신경과학 : 사회적인 뇌 치유하기, Louis Cozolino 저, 강철민 이영호 역, 2014, 학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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