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광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저는 할아버지에 대한 애착이 큰 편입니다. 갓난아이 시절 조부모님 손에 잠시 커서이기도 할 겁니다. 할아버지께서도 본인이 손수 키웠던 손자라 많은 애정을 주셨습니다. 항상 당당하셨던 할아버지로 기억합니다. 할아버지께서는 2년 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95세의 연세에 중병 없이 돌아가셨기에 주변에서 호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께서 6개월가량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시기까지 그 죽음의 과정은 무언가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생의 마지막 시간을 낯선 병원에서 쓸쓸하시지 않으셨을까 생각하면 그때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죄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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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스피스 완화의료에서 정신의학의 역할

그 영향인지 저는 지금 호스피스 완화의료에서 진료하는 몇 안 되는 정신과 의사 중 한 명입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말기 암 등 더 이상의 적극적인 치료가 무의미한 환자에게 임종 시기까지 신체적 통증과 증상을 조절하고 정서적 안정을 돕는 의료 영역입니다. 제가 있는 의료기관에서는 제가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진료를 담당하고 다른 한 분이 신체 증상과 관련된 진료를 담당하며 모든 환자를 함께 돌보고 있습니다. 의료선진국의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정신과 전문의가 대부분 포함되어 있지만 국내에서는 정신의학의 역할이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말기 암환자에서는 우울이나 불안, 불면 등의 증상이 동반되기 쉽지만 의식이 혼동되며 초조와 환각으로 밤잠을 설치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러한 증상을 “섬망”이라고 하는데 하루 중에도 증상 변동이 심해 환자나 가족 보호자, 의료진을 모두 힘겹게 만드는 증상입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환경에서는 질병의 경과 악화로 인해 뇌기능이 흔들리며 섬망이 생기기 쉽고 암성 통증 조절을 위해 사용하는 마약성 진통제가 용량이 점점 증가하면서 의식의 혼동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섬망으로 밤새 힘들어하는 환자를 통증으로 인한 고통으로 잘못 인식해 마약성 진통제를 더 투약하는 악순환이 생기는 경우도 드믈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섬망 치료를 함께 하면 이전보다 마약성 진통제를 줄이고도 더 편안하게 지내게 됩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에서 정신의학은 환자의 진료도 중요하지만 환자의 가족 및 의료진에 대한 정서적 지원도 중요합니다. 가족의 임종을 돌보는 입장에서 가족 보호자도 함께 고통을 겪으며 지쳐가게 됩니다. 환자보다 가족이 죽음을 더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근무하는 간호사와 의사 등 의료진도 신체적, 정서적 소진을 경험하는데 의료진도 사람인지라 환자의 임종을 돌보며 반복해서 경험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영역에서 정신의학은 환자나 가족, 의료진 모두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죽음의 질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의 산하기관 연구소에서 2010년에 죽음의 질을 발표하였는데 당시 한국은 40개국 중 32위로 하위권이었습니다.1) 그때는 암 진단을 받아도 가족이 환자에게 알리지 않는 경향이 많았고 의료진도 치료의 가능성이 없음에도 마지막까지 적극적인 치료를 지속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치료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경우에도 항암치료 등 체력적으로 힘든 치료를 지속하고 인공호흡기 등 연명을 위한 기계에 의존해 중환자실에서 가족과 떨어진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습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제공하는 병원도 적었고 호스피스는 정말 죽기 직전에 가는 곳으로 인식되었죠.

그런데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임종기 의료에 대한 인식이나 상황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같은 기관에서 2015년에 발표된 죽음의 질에서 한국은 80개국 중 18위로 5년 만에 큰 개선이 이루어졌습니다.2) 암에 걸리더라도 이제는 환자에게 숨기지 않고 환자와 가족이 의료진과 함께 향후 치료 방향에 대해 상의하게 되었습니다. 올해 2월부터는 연명의료결정법도 시행되면서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환자나 가족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인식도 정착되어 가고 있습니다. 국가 정책적으로도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지원하며 관련 의료기관이 늘어나고 있고 대중적인 인식도 많이 나아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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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적 지지 돌봄

그럼에도 지금 우리나라에서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저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돌이켜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하고 금기시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가능할 때는 다가올 임종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막상 임종기가 가까워졌을 때는 의식이 떨어져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치매와 같은 인지장애가 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존엄한 죽음은 더 의식이 맑고 대화가 가능할 때 가까운 사람들과 삶을 되돌아보며 추억하고 당부를 하며 작별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서구 의료선진국에서는 진행성 암의 진단 초기부터 완화의료적 돌봄을 제공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3) “완화 돌봄(palliative care)”이라는 명칭을 환자나 가족이 받아들이기 편하도록 “지지 돌봄(supportive care)”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4) 병의 진단 시점부터 완치를 위한 병의 치료도 필수적이지만 치료에도 불구하고 병이 더 진행되는 것에 대한 대비도 함께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모순적이게도 이러한 완화 돌봄을 조기에 시행한 경우에 진행성 암의 생존기간이 더 늘어나기도 했습니다.5)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조기 완화 돌봄을 포함한 통합의료는 환자의 삶의 질과 죽음의 질을 향상시킵니다.

 

♦ 메멘토 모리

우리나라는 올해 고령화 사회를 넘어 고령사회로 진입했고 초고령사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죽음의 질을 높이고 존엄한 죽음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깨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죽음 앞에 하루를 귀하게 살아가라는 격언입니다.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도 “메멘토 모리”는 생의 끝자락이 아닌 생의 가운데 “죽음을 기억하고 준비하라”는 새로운 의미를 지닙니다. 치료의 의학을 넘어 돌봄의 의학으로 호스피스 완화의료에서 정신의학의 역할이나 중병의 진단 초기부터 제공되는 통합적 지지 돌봄이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인 의료로 정착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 참고문헌

1) Unit, Economist Intelligence. "The quality of death, ranking end-of-life care across the world. A report from the Economist Intelligence Unit commissioned by LIEN Foundation." Economist Intelligence Unit, London (2010).
2) Unit, Economist Intelligence. "The 2015 Quality of Death Index: Ranking palliative care across the world." London: The Economist Intelligence Unit (2015).
3) Bruera, Eduardo, and David Hui. "Integrating supportive and palliative care in the trajectory of cancer: establishing goals and models of care." Journal of Clinical Oncology 28.25 (2010): 4013-4017.
4) Dalal, Shalini, et al. "Association between a name change from palliative to supportive care and the timing of patient referrals at a comprehensive cancer center." The Oncologist 16.1 (2011): 105-111.
5)Temel, Jennifer S., et al. "Early palliative care for patients with metastatic non–small-cell lung cancer."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363.8 (2010): 733-742.

 

이광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마인드랩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경북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박사,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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