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중독포럼 김태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애주가인 A씨에게 언제부터인가 남에게 말 못 할 고민이 생겼습니다. 술을 마신 다음날이면 전날 일이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밤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어 거의 매일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술이 없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허전하고 불안해서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도 몰래 술을 마시게 됩니다. A씨는 술자리에서 실수를 할 때마다 술을 줄이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또 술을 찾게 됩니다. 

A씨는 결국 고민 끝에 정신과에 내원하여 의사에게 술과 연관된 고민과 걱정을 털어놓았습니다. A씨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알코올 사용장애’라는 질병의 증상이라는 설명을 듣고, 의사의 권유대로 외래 치료를 받아보기로 합니다. 그는 처방받은 약을 지시대로 복용하면서, 우선은 다음 외래 내원하는 날까지 딱 1주일간 술을 안 마셔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렇게도 A씨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술 생각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매일 술을 마시던 A씨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A씨처럼 강박적으로 떠오르는 술 생각 때문에 거의 매일 술을 마셔오던 사람이 어떻게 ‘술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되는 걸까요? 물론 A씨가 복용하는 항갈망제라는 약은 술에 대한 갈망감을 줄여주어 단주에 도움을 주는 중요한 약물입니다. 그러나 A씨처럼 치료를 시작함과 동시에 술에 대한 집착이 확연히 줄고, 술이 없어도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항갈망제의 효과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A씨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건 아마도 술 때문에 고민하던 A씨가 자신을 괴롭히던 ‘수치심’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수치심’은 알코올 의존 증상이 진행되면서 중독자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핵심 감정입니다. 수치심은 몹시 고통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에 중독자는 이를 잊기 위해 현실을 부정하고 ‘술을 얼마든지 조절해서 마실 수 있다.’라는 환상에 빠져 중독 행위에 몰두하게 하고, 결국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외로운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A씨는 지금과 같지 않았습니다. 단지 술을 마시면서 남들과 어울리는 것이 즐거웠을 뿐 자신에게 술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A씨는 속마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잘 표현하지 않는 편이어서, 가족과 친구에게 위안을 받기보다는 혼자 술을 마시면서 풀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술의 양과 빈도가 늘어가고, ‘이제는 술을 줄여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써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A씨는 그럴 때마다 ‘내가 이까짓 술도 이겨내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라니!’라는 생각에 비참한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분도 잠시, 술을 마시면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것 같아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폭음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림. 수치심과 알코올 중독의 악순환


이처럼 수치심은 알코올 중독에 있어서 중독 행위를 유지, 강화시키는 연료와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중독자는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수치심은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순간 그 파괴적인 힘을 잃습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내 문제를 잘 이해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어 도움을 청하는 순간 수치심은 서서히 사라지게 됩니다. 수치심이 사라지면서 강박적으로 따라다니던 술에 대한 갈망감도 힘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알코올 의존 치료의 가장 첫 단계는 ‘자신이 술 앞에 무력했음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할 때 진정한 치유가 시작됩니다. ‘나는 이미 내 술 문제를 충분히 알고 있어. 그러니까 참견하지 마!’라는 식의 태도로는 중독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술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라는 논리는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유롭게 술을 계속 마시겠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이처럼 A씨가 경험한 치료 효과는 의사가 처방한 약의 효과 때문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고 도움을 받기로 한 결심이 A씨를 ‘수치심’으로부터 해방시켰고, 그 결과 중독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게 한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 중에서도 술 문제로 고민하고 계신 분이 있으신가요? 혼자 해결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남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고통받고 있다면 지금부터 그 문제들을 드러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혼자 고민하지 마세요. 함께 이야기해보면 문제 해결책의 실마리가 보일 것입니다.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Alcoholics Anonymous) 홈페이지 안내
http://www.aa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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