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성 정신의학과 전문의 

 

M/56, 알코올성 간 경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지내면서 격하게 화를 내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너무나도 다양한 삶의 유형과 심리적인 어려움들을 매일같이 접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감정이 올라오는 상황에서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감정의 흐름을 관찰하고 치료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배움 덕분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진료 후에 한참 동안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던 일이 수련 기간 중에 한 번 있었다. 다른 과 병동에 입원하고 있던 환자의 자문 진료였다.

대학병원에 입원하는 환자들, 특히 신체적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들은 한 개 진료과의 영역을 넘어선 여러 가지 건강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알코올성 간 문제로 이식을 받게 되는 사람의 경우 내과, 외과적 협동 진료가 필요하다. 동반된 알코올 남용, 불면 등의 문제에 대해 정신과적 소견을 묻는 경우도 종종 있음은 물론이다.

외과 레지던트가 보낸 진료 의뢰를 읽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보통은 치료 경과를 요약한 잘 정리된 기록이 의뢰서의 앞부분에 나오기 마련인데, 이번 의뢰는 편지처럼 줄글로 되어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자문 진료를 하는 의사에게 맡길 내용이 많다는 뜻이고, 평소와 비슷한 유형의 진료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핵심은 알코올성 간 문제로 이식을 받았던 환자인데 치료 순응도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알코올 문제에 대한 치료 계획 수립과, 두 번째 간 이식을 진행해도 되는 정신과적 상태인지에 대한 문의였다.

한여름의 병실은 냉방이 잘되지 않아서 더웠다. 1인실에 들어가니 환자는 누워 있었고 부인과 두 딸, 사위로 추정되는 젊은 남성이 한 사람 있었다. 병실에 들어가서 진료 목적을 이야기하자마자 환자 부인의 넋두리가 쏟아졌다. 부인, 그리고 딸들과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환자는 56세 남성으로, 동 단위 행정구역의 공무원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젊을 때부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 술자리가 잦았다. 바깥 생활을 너무 좋아해 집에는 소홀했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은 드물었다. 가정 경제에 대한 책임도 다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은 줄었지만 혼자서라도 매일 술을 마셨다. 40대 후반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자꾸 피곤했고 점차로 병색이 뚜렷해졌다. 그렇지만 이미 인이 박인 까닭에 계속해서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노랗게 뜨기 시작했다. 부인, 딸들과 음주 문제로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지만 행동의 변화는 없었다. 환자는 내 몸, 내가 원하는 대로 쓰겠다는데 다들 왜 그렇게 간섭을 해 대느냐고 역정을 내었다.

뒤늦게 내원한 병원에서 간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금주를 권유받았다. 그러나 술을 끊어보려는 노력도 잠시, 이내 음주를 계속했다. 복수가 차 숨이 가빠서 술을 넘길 수가 없을 때가 되어서야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닌 금주를 시작했다. 간 이식을 받아야만 삶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은 딸이었다. 조르고 졸라서 진행한 검사에서 딸 둘 모두 공여에 적합하다는 소견을 받았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환자는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다. 아버지로서 가족들에게 소홀했던 것에 용서를 빌었고 이식을 받아 새 삶을 살게 된다면 지난 날과 달리 성실한 남편, 따뜻한 아버지가 될 것을 맹세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수없이 많은 술 문제를 떠올리며 모두 진저리를 쳤지만 큰딸은 선뜻 이식을 결심했다.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늘 힘들었고 이제는 병수발로 야위어 버리기까지 한 어머니를 위한 결정이었다고 큰딸은 이야기했다. 그렇게 환자는 큰딸에게 간 이식을 받고 삶을 되찾았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퇴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는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반성과 후회, 금주 약속은 온데간데없었다. 자식의 간을 받아 놓고도 술을 다시 입에 댈 수가 있느냐는 부인의 절망 어린 탄식을 뒤로하고 음주량은 점차 늘어 갔다. 간은 다시 빠르게 망가졌고, 이전과 같은 상태가 되어 입원했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환자는 가족들을 설득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차마 남편을, 아버지를 죽도록 놓아 둘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모두가 고민했다. 환자는 이렇게 자신이 죽어 가도록 내버려둘 것이냐고 울고, 협박하고, 애원했다. 그렇게 둘째 딸의 간을 이식받기로 한 상태로 내게 진료가 의뢰된 것이었다.

장기 이식과 관련한 정신과적 진료에 있어, 공여자가 자발적으로 장기를 기증하고자 하는 것인지와 환자가 이식에 적합한 상태인지를 평가하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경우는 어떨까? 둘째 딸 스스로의 결심이라고는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녀는 완전히 자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술을 마실 가능성이 높은 이 환자는 장기 이식에 적합한 상태일까? 교과서는 자발성과 관련해 누구의 강요도 없이 본인 스스로의 자유 의지로 결정한 것이어야 윤리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알코올 중독으로 조절이 잘되지 않는 경우는 간 이식의 금기에 해당한다고 명쾌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처럼 자의도 아니고 타의도 아닌 상황이 분명 존재한다. 공여 의사를 밝힌 가족 구성원이 있고 환자가 금주 의지를 밝히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알코올 문제가 재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를 들어 이식을 중단시키기도 어렵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간 이식 결정은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져 온 가족의 감정적 문제들이 한꺼번에 얽혀 있는 매듭과도 같았다. 매듭을 푸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고 어쩌면 풀 수 없을지도 몰랐다. 매듭을 푸는 동안 겪어야 할 마음의 고통이 불을 보듯 뻔했고 이런 경우 대다수는 매듭을 풀지 않는 쪽을 택하곤 한다.

더군다나 환자의 건강 상태는 악화되고 있어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다. 결국 치료진은 상의하에 이식을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견으로는 수술 후에 반드시 정신과에서 알코올 진료를 받도록 해 달라는 말을 남겼지만 잘되리라는 자신은 없었다. 환자와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몹시도 궁금했지만, 예상되는 결과가 두려워 나중에 당시 외과 주치의를 만났을 때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지금도 그때 그 환자가 어떻게 지내는지, 두렵도록 궁금하다.

김재성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으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인턴,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선생님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글 덕분에 제 마음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