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응급실 당직을 서며 생후 3개월 된 아이가 죽어 응급실을 방문한 환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불안한 눈빛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듯한 황망한 표정으로 응급실 침대 위에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고 있던 그녀는, 이제 막 장례식장에 수속을 마치고 다녀오는 길이었다. 아이의 시신을 들고 헐레벌떡 응급실로 달려왔으나 결국 사망선고를 받고 난 후, 장례식장 차가운 영안실에 자그마한 한줌 몸뚱아리를 내려놓고 온 그녀는 슬퍼 보인다기 보다는 그저 멍하게 지친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듯 했다. 정신과 상담이 필요할 것 같다는 보호자의 요청으로 당직 콜을 받고 내려가 마주친 그 환자의, 차마 슬픔마저 쏟아내기 어려워하는 모습 앞에서 나는 감히 위로의 한마디조차 쉽게 꺼내기 어려워했던 것 같다.
침대 위에서 아기를 어르고 있던 중, 옆방에서 들려오는 큰 첫째 아이의 울음소리에 잠시 자리를 비웠던 자신의 불과 몇시간 전 과거를 그녀는 사무치게 자책하고 있었다. 침대로 돌아왔을 때는 아기의 얼굴 위에 배게가 넘어져 있었고, 아기는 이미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고 했다. 아이 잃은 모정의 슬픔이 면담 몇 마디와 진정제 주사 따위에 흩어질리야 만무하겠지만 응급실 당직 의사로 내가 해줄 수 있던 것은 그 정도였다.
일상적인 스트레스 이상의 강한 정신적 외상을 경험한 이후에는 종종 유의할만한 일상생활의 장애를 야기할만한 정신병적, 신경증적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생명의 위협에 준하는 외상적 경험을 한 이후에 발생하는 괄목할만한 행동변화는 보통 경험 이후 1달 이내에는 ‘급성 스트레스 장애’로, 1달 이후에도 지속될 경우에는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로 진단된다. 교통사고나 전쟁 이후의 계속적인 재경험, 과각성, 악몽등의 증상으로 힘들어하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의 이야기는 최근 방송매체에서도 많이 다루어지고 있으며, 정신과내에서도 무척 주목받고 있는 분야 중의 하나이다. 또 최근 날이 갈수록 그러한 환자들을 위한 새로운 치료법이나 약물치료, 행동치료법들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이제 막 아이를 잃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현실에 마주했던 그 환자도 시간이 흐르면 급성 스트레스성 장애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발전할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적응장애(adjustment disorder)나 우울증의 발병으로 이어질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장 응급실에서, 이제 막 갑작스러운 충격을 마주친 그 현장 그곳에서 나중에 그녀가 어떤 정신과적 질환으로 악화될지에 대해서는 쉽사리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잘 이겨내길 기도하며 꾸준히 관찰하다가, 증상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해야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최근 진행되고 있는 동물실험 수준의 연구로 급성 스트레스를 경험한 직후에 개입할 수 있는, 향후 행동변화의 예방 가능한 해법이 밝혀지고 있다. 실험용 쥐들을 대상으로 포식자의 배설물 냄새를 맡게 한 직후 당질코르티코이드(glucocorticoid)제제를 주사한 실험군을 한달 뒤에 관찰한 결과, 주사를 해주지 않았던 대조군 쥐들에 비해 유의할만한 차이를 보였다고 한다. 포식자의 냄새를 맡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뒤에 아무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던 쥐들은, 대개 한달 뒤에도 미로 탈출 능력이나, 일반 자극에 대한 반응 정도가 유의하게 저하된 모습을 보였다. 포식자에 대한 공포스러운 기억이 시간이 지나면서 공고해져 장기적인 인지기능이나 반응양상에도 악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렇지만 위협을 느낀 직후 당질코르티코이드 주사를 맞았던 쥐들은 한달 뒤 측정한 인지, 반응능력의 저하가 대조군에 비해 훨씬 미미하거나 없었다. 위협적인 경험으로 인한 공포기억이 재처리되고 강화되는 (consolidation) 과정이 당질코르티코이드에 의한 스트레스반응 억제로 인해 약화될 수 있다는 말이다.
충격적인 경험이나 처리하기 힘든 수준의 스트레스는 공포조건화를 일으키며 그 이후의 일상적인 자극에 대한 반응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스트레스 상황에서의 내분비적, 자율신경계적 교란은 공포경험에 대한 기억력과 회상을 강화시키며, 더욱 강렬하고 무서운 기억으로 구조화되도록 만든다. 공포자극에 대한 반응과 행동변화에 대한 과정은 인간의 다른 복잡한 감정들에 비해 비교적 그 생물학적 기전이 잘 알려져 있다고한다. 이를 토대로 현재 연구되고 있는 앞서 말한 실험과 같은 결과들은 스트레스성 장애의 치료 뿐 아니라 그 예방에도 희망적인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현재로선 아직 임상수준에서의 이렇다 할 결과가 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향후에는 전시의 참전 군인이나 성폭력 직후의 피해자 등과 같이 받아들이기 힘든 정신적 외상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들에게, 정신과적 위기개입 면담 이외에도 근거 있는 생물학적 도움을 줄 수 있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 Early Post-Stressor Intervention with High-Dose Corticosterone Attenuates Posttraumatic Stress Response in an Animal Model of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 BIOL PSYCHIATRY 2008;64:708–717
: Blood–brain biomarkers for stress susceptibility / PNAS September 16, 2014 vol. 111 no. 37 13253–13254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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