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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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괜찮아 보여야 한다”는 분위기가 우리 삶 곳곳에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일터에서, 가정에서, 인간관계 속에서 누군가가 “요즘 어때요?”라고 물으면 마음은 복잡해도 “잘 지내요”, “그럭저럭요”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옵니다. 사실은 괜찮지 않아도, 마치 괜찮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는 일이 일상이 된 분들이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괜찮은 척’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감, 가슴 속에 쌓이는 무거운 감정들, 자꾸 줄어드는 에너지와 집중력, 그리고 점점 자신조차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감정 억압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억압이란,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의식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억누르는 심리적 방어기제를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아 속상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억울한 일을 겪고도 화낼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 자체가 줄어들고, 결국 감정을 느끼는 힘까지 약해지게 됩니다.

 감정 억압은 단기적으로는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거나 일상생활을 기능적으로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마음과 몸에 큰 부담을 줍니다. 억눌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만성 피로, 집중력 저하, 수면 문제 같은 신체 증상이나 대인관계 회피 등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나 번아웃으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실제로 정신건강 연구들에서는 감정을 억제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고, 신체 건강 지표도 더 나쁘게 나타난다는 결과들이 반복적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그로스(James Gross)의 ‘감정 조절 이론(emotion regulation theory)’에 따르면, 감정 억제는 일시적으로는 기능적인 전략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정서적 부담을 증가시키고 신체적, 심리적 반응을 더 증폭시킵니다.

 또한 정신의학적으로는, 억압된 감정이 우울증이나 불안장애의 기저에 있을 수 있으며, 자존감 저하나 자아감 약화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감정을 억누르다 보니 나중에는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를 ‘정서적 둔마(emotional blunting)’라고 부르며, 감정적 피로가 깊어진 상태에서 많이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일러스트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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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악순환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요?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칩니다. 폭발까지는 아니더라도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뤄지는 감정표현도 많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감정을 잘 알아차리고, 조금씩 안전하게 표현하는 연습이 중요합니다.

 먼저,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건 무엇일까?”, “이 감정은 어떤 상황에서 시작된 걸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죠. 처음에는 낯설고 막연할 수 있지만, 이렇게 감정을 구체적인 이름으로 불러보는 과정은 우리가 나 자신과 다시 연결되는 데 꼭 필요한 단계입니다.

 다음으로는, 감정을 너무 큰 부담 없이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꼭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더라도 일기나 메모, 혹은 감정 일기 앱 등을 활용해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오늘은 좀 마음이 무거워요” 한 마디를 건네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감정 억압이 오래 지속되었거나, 이미 일상생활에 영향을 줄 정도로 지쳐 있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상담이나 심리치료는 단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 이상으로, 억눌린 감정과 감각을 안전하게 풀어내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결코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감정을 잘 다루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더 잘 돌볼 수 있고, 관계도 더 건강하게 맺을 수 있습니다.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하루, 그런 일상이 여러분에게도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우리 마음은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단지 그 신호를 오랫동안 무시해 온 것뿐이지요. 이제는 그 마음의 언어에 조금 더 귀 기울여 볼 때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말을 하고 있었나요? 내 마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내 마음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연습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서울역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정희주 원장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역 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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