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김예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늘은 피하고 싶은 고통과 시련의 순간을 마주하며, ‘사는 것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느끼는 분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가능하다면 일시정지 버튼과 되감기 버튼을 눌러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싶지만, 이미 마주한 눈앞의 잔혹한 현실이나 과거의 기억이 발목을 붙잡아 쓰러질 듯한 상태에 계신 분들을 진료실에서 자주 만나곤 합니다. 또한, 특별히 중대한 스트레스가 없더라도 ‘사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혹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반복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다가온 새해가 조금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조심스레 이 책을 소개드립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인 빅터 프랭클은 빈 의과대학의 신경정신과 교수이자 로고테라피(Logotherapy) 학파를 창시한 학자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3년간 다하우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생활했습니다. 로고테라피는 삶의 의미에 중점을 둔 정신 치료법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 다양한 정신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프랭클 박사는 “어떤 학자들은 의미와 가치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나 반사 작용 그리고 승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이상과 가치를 위해 살 수 있는 존재이며, 심지어 그것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존재이다.”라며, 의미의 강력한 영향을 강조합니다.
수용소 가스실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생을 마감하고,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고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라고 느껴질 만큼 참담했던 시간 속에서도,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지 않도록 돕고자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가 만연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를 간직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명백하게 몰상식한 이런 시련에서 더 큰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지 않는 한,
[...] 순간적인 위안들은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북돋아 줄 수 없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실존주의의 중심적인 주제와 만난다.
즉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으려면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만약 삶에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없다.
각자가 스스로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수용소의 생활은 수감자들에게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인간적 목표를 빼앗아 갔습니다.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부당한 상황을 겪으며 느끼는 정신적 고통과 모멸감은 그들을 더욱 괴롭게 했습니다. 이러한 불확실성과 무망감 속에서, 현대인들 역시 때로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무감각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우리가 책임감을 가지고 잠재된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를 위한 세 가지 가치 체험을 제안합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첫 번째는 ‘창조 가치’로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기를 쓰거나 직장에서 자료를 준비하는 등 일상 속 작은 활동도 창조에 해당됩니다. 가정에서 한 생명을 창조하는 임신과 출산의 과정 역시 창조 가치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실천해온 작은 창조 활동들 속에서 숨겨진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가치 체험은 ‘체험 가치’로 세상이 제공하는 다양한 경험을 누리는 것입니다. 학습 활동이나 정서적 교감을 통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도 체험 가치에 포함됩니다. 만약 현재 모든 것이 버겁고 에너지가 부족하다면, 잠시 의자에 기대어 자연을 바라보거나 차분히 커피 한 잔을 음미하는 작은 경험부터 시작해도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를 찾는 여정에서 이런 경험들이 외적인 성취만을 좇는 태도를 보완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가치는 ‘태도 가치’로 피할 수 없는 비극이나 시련 속에서도, 스스로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프랭클 박사는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라고 주장합니다.
저자는 또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라는 관점을 제안합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한 순간에도,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책임과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실존적 공허감을 벗어나 자살 예방의 차원에서도 강력한 보호 장치가 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인생이 그들로부터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중요하다.
[...] 나는 삶이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고, '
사람'이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우리는 의미 있다고 느끼는 무언가를 위해 흔쾌히 시간을 할애하고, 마음과 생각을 쏟으며 지갑을 열기도 합니다. 때로는 정말 의미 있다고 믿는 것을 위해, 다른 이들이 무모하다고 여길 선택이나 결정을 용감하게 내리기도 하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각자의 삶이 가진 고유한 의미를 대신 결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일회적인 삶에서, 스스로 부여한 독자적인 의미의 우열 또한 누구도 가릴 수 없습니다. 혹여 독자분들 중 지금 삶의 어떤 시점을 의미를 상실한 채 지나가고 계신다면, 다가오는 새해에는 이 책이 실종된 의미를 구조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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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소개해드리는 [Sincerely yours,] 시리즈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관점과 추천이 반영된 책을 읽고 싶어 하시는 환자분들을 진료실에서 만나며 필요성을 느껴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영어 편지나 이메일의 끝인사로 사용되는 'Sincerely yours,'는 '진심을 담아' 또는 '당신의 진실한 -로부터'라는 뜻으로 매우 정중하지만 서로 알고 있는 친밀한 사이에서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진료실에서 나누는 상담이 가진 기억 지속 시간의 한계를 넘어, 평소에도 소지할 수 있는 문자화된 책을 통해 진료실 밖에서도 환자분들이 원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정신건강을 스스로 돌볼 수 있도록 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직접 책을 읽고, 책을 처방해봅니다.
궁금했던 책이나 고민이 있으신 내용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향후에 알맞은 책을 찾아 소개해 드릴게요. 그럼 안녕히 계시고 다음 편지에서 또 뵐게요.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김예슬 원장
한양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한양대학교 대학원 정신건강의학과 박사 졸업
한국정신분석학회 정신치료 전문과정 이수
전) 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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