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김예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영화 속 등장인물이 외친 이 말은, 현실의 인간관계에서도 종종 사실이 됩니다. 약속 시간은 매번 상대의 하소연으로 끝나고, 원하는 것을 얻은 뒤에는 가차 없이 연락이 끊기는 사이. 그런 만남을 반복하다 보면 집에 돌아오는 길, 문득 이용당한 것 같은 찜찜함이 남습니다. 만나는 시간과 장소도 오직 상대의 편의대로 정해지고, 내 상황과 지갑 사정은 관심 밖이 되기 일쑤지요. 서운함을 조심스레 표현하면 “너는 왜 이렇게 예민해?”라는 핀잔이 되레 돌아온 적도 있으실 겁니다. 오늘은 상대에게 맞추느라 불합리한 일들을 수차례 견디다 방전된 분들께 편지를 보냅니다. 이 책과 이 편지가 뒤틀린 관계에서 벗어나 나를 지키는 방법을 찾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불편과 위협 앞에서 여러 ‘F’ 반응을 보입니다. 싸우거나(Fight), 도망가거나(Flight), 얼어붙는(Freeze) 반응이 대표적이지요. 그런데 관계를 잃지 않으려는 불안이 클 때는 상대를 지나치게 달래고 맞추는 Fawn(맞추기) 패턴이 나타납니다. 복합외상(Complex PTSD) 분야의 심리치료 전문가 피트 워커(Pete Walker)는 이를 가해자의 정서를 달래 안전을 확보하려는 대처와 방어 반응으로 설명합니다.
단기적으로는 위험을 줄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자기 경계와 정체성이 침식될 수 있기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때 무엇이 ‘배려’이고 어디서부터가 ‘생존을 위한 방어’인지, 행동의 동기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절 뒤 과도한 불안이나 죄책감 때문에 자동으로 양보하고 먼저 사과하고 있지는 않은지, 상대의 분노가 엉뚱하게 나를 향할 때 내 감정과 욕구를 눌러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시간과 정서, 돈을 반복적으로 과지출하고 상대가 그것을 ‘맡겨둔 권리’처럼 요구한다면 잠시 멈추어 서서 경계를 다시 그어야 합니다.
“'나와 너의 관계’, '나와 그것의 관계'는
착취-피착취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핵심이다.
달리 표현하면 '나와 너의 관계’란 교감을 이루고 상호성이 전제된 사이를,
'나와 그것의 관계’는 자기 욕구만 채우면 되는 일방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 처음부터 확실히 이해관계로 보이면 내 감정이 소모되지 않으니 뒤끝이 없다.
[...] 그래서 이 둘을 구분하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디로 끌려가는지 알면 억울하지나 않지, 자기는 진정한 관계라 믿고 열과 성을 다했는데 ‘너는 아니었구나.'가 되면 상대에 대한 원망을 넘어서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을 피할 길이 없다.”
여기서 기준이 되는 개념이 상호성(Reciprocity)입니다. 관계가 건강하려면 주고받음의 흐름이 양쪽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일시적 불균형은 있을 수 있어도 전반적으로 관심, 노력, 시간이 서로를 향해 오가야 하지요. 반대로 상대의 필요만 일방적으로 채워지고 나의 필요가 무시된다면 그 관계는 이미 ‘나와 너’가 아닌 ‘나와 그것’으로 기울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이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필요’라는 단어가 이해타산처럼 들릴 수 있지만 정서적 지지, 함께 있음이 주는 안정감, 돌봄 역시 엄연한 필요입니다. 그러니 필요를 단순한 거래의 언어로 좁히지 말고 정서적 지지와 존중, 안정감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넓혀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기대하는 필요의 구체적 모습을 살피는 데서 건강한 자기 보호가 시작됩니다.
“자기 필요를 올곧이 인정하는 법,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인간됨을 유지하는 법,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법, 관계에서 존엄성(dignity)을 잃지 않는 법,
나와 타인의 가치를 파괴하지 않는 법, 정글 같은 사회에서 이용만을 목적으로 득달같이 달려드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는 법, 바로 그런 것을 알아야 한다.
순수한 관계에 대한 강박에 갇힌 상태에서는 이 같은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법을 갖기 힘들다. 나를 지키고 결과적으로 너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상론이 아닌 현실론,
즉 서로의 필요를 인정하는 전제에서 답을 찾아나가야 한다.”
정신분석전문의 성유미의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는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계속 이어온 불편한 관계를 상호성과 경계라는 기준으로 다시 점검하게 돕는 책입니다. 저자는 때로는 멈추고, 거리를 두고, 관계의 모양을 재조정하며, 필요하다면 이별까지 고려하는 과정을 통해 착취적 패턴 속에서 실행 가능한 규칙을 제시합니다. 호의와 배려는 교감 속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방적 제공으로 굳어지면 결국 남는 것은 공허와 소진뿐입니다. 그러므로 ‘착함’과 ‘배려’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관계의 불균형을 인식하고, 필요를 말할 권리와 거절할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브레이크를 두려워하지 마라.
차를 운전할 때 우리는 안전이 위협받는 순간 당연히 브레이크를 밟는다.
마찬가지다. 관계가 파괴 양상으로 치달을 때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관계는 주고받음이다. 쌍방향이다. 내가 있고 네가 있는 것이다.
그 균형이 무너졌을 때 우리는 이별을 고할 수 있다.
다만 이별을 먼저 결심했다면 상대에게도 시간을 주도록 하자.
제멋대로인 상대에게 지쳐서 끝내고 싶든, 자신을 지키고 싶어서 끝내고 싶든
이별의 사유와 상관없이 적어도 본인이 고민한 시간의 절반이라도
상대에게 내어주길 바란다. 그래야 상대방도 그 시간만큼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런 후 헤어짐을 받아들일 수 있다. 누군가가 내 손을 놓고자 할 때
그 뜻을 인정하고 같이 놓아주는 것이 최고의 배려라면,
먼저 손을 놓기로 한 사람 역시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
내 곁의 그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부르고 싶으신가요? 서로를 진정성 있는 인격으로 대하는 ‘나와 너’, 아니면 서로를 수단으로만 대하는 제한적인 ‘그것과 그것’. 만약 지금 내가 일방적인 ‘그것’의 자리에 서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관계는 없다”라는 책의 메시지를 기억해 주세요. 관계의 모양은 다시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은 나의 경계와 상호성을 회복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불편을 알아차렸다면, 이제 다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입니다. 독자분은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지, 누군가의 감정을 존중 없이 무차별적으로 떠안아야 하는 ‘감정 쓰레기통’이 결코 아니며, 이 관계에서도 독자분의 존엄은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인생은 좋은 사람을 붙잡지 못하는 것보다
보내야 할 사람을 '제때' 보내지 못할 때 더 크게 훼손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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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소개해드리는 [Sincerely yours,] 시리즈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관점과 추천이 반영된 책을 읽고 싶어 하시는 환자분들을
진료실에서 만나며 필요성을 느껴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영어 편지나 이메일의 끝인사로 사용되는 'Sincerely yours,'는
'진심을 담아' 또는 '당신의 진실한 -로부터'라는 뜻으로
매우 정중하지만 서로 알고 있는 친밀한 사이에서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진료실에서 나누는 상담이 가진 기억 지속 시간의 한계를 넘어,
평소에도 소지할 수 있는 문자화된 책을 통해 진료실 밖에서도
환자분들이 원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정신건강을 스스로 돌볼 수 있도록 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직접 책을 읽고, 책을 처방해봅니다.
궁금했던 책이나 고민이 있으신 내용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향후에 알맞은 책을 찾아 소개해 드릴게요. 그럼 안녕히 계시고 다음 편지에서 또 뵐게요.
한양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한양대학교 대학원 정신건강의학과 박사 졸업
한국정신분석학회 정신치료 전문과정 이수
전) 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