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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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동안 우리 삶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행입니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여행은 상상 속의 일처럼 느껴졌고, 가까운 친구들이나 가족, 친지들을 만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함께 사는 가족이나 직장 동료같이 소수의 사람들과만 접촉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지기도 했습니다. 

코로나가 종식된 것은 아니지만, 3년여 만에 엔데믹(endemic)에 가까워지면서 이제 코로나를 우리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잃어버렸던 일상의 많은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 ‘여행’이 있습니다. 

여행하며 느끼는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바로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자유’와 ‘새로운 경험’일 것입니다. 익숙했던 곳을 떠나 여행지에서 접하는 새로운 풍경과 음식, 언어, 사람들은 모두 우리에게 신선함을 선물해 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각지 못하게 새로운 친구를 사귀거나 여행의 동행자를 만나면 그 즐거움은 배가됩니다. 

여행지로 떠나는 비행기 안이나 기차 안에서, 혹은 여행지에서 잠시 목을 축이러 들어간 카페나 펍에서 낯선 사람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눠 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여행을 떠나는지 등 소소한 이야기로 시작했던 대화가 몇 시간 동안 이어지고 깊이 있는 주제로까지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낯선 사람이었던 상대방이 어느새 친밀감 있게 느껴지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했던 깊은 고민까지 나누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 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는 심리학자인 직 루빈(Zick Rubin)이 1975년 논문에서 처음 소개한 개념으로, 매일 만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부담을 주게 될까 봐 혹은 그들과 직접적으로 얽혀 있기에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일들을 기차에서 만난 사람처럼 낯선 이방인에게 이야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을 처음 만난, 그리고 곧 헤어질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니 얼핏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아마 고개가 끄덕여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에게든 나의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데는 위험 부담이 따릅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가까운 친구나 동료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가 약점을 잡히거나 소문이 돌 수도 있다는 걱정, 혹은 내 이야기로 인해 아끼는 사람들에게 짐을 지워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해 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에 반해 비행기, 기차,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낯선 이들은 나에 대해서 아는 것도 많이 없고, 비밀이 누설되었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도 거의 없습니다. 

그저 잠시 인연이 닿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 돌아서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그뿐입니다. 상대방이 내 이야기로 인해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내 주변 사람에게 소문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편안한 고민 상담자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 고민에 직접적인 해결책을 주지 않더라도 속 시원히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정서적인 만족감을 얻을 수 있고, 때로는 전혀 생각지 못한 새로운 시선에서 내 문제를 바라보도록 도와주는 조언을 얻는 행운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낯선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보편적인 희로애락에 공감하며 누군가를 도와주었다는 보람, 이타적인 행동을 했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낯선 이방인과의 대화가 화자와 청자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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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독서 모임이나 대화 모임 등이 활성화되면서 낯선 이들과의 교류, 삶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즐기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아마도 이런 낯선 이들과의 나눔을 통한 정서적 만족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편 코로나 기간 중 외출이나 사적 모임이 줄어들면서 함께 생활하는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은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부딪치는 부분이 늘어난 영향도 있고, 이전에는 가족 이외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던 고민을 나누기 힘들어지면서 가까이 있는 가족에게 더 이야기하고 정서적 욕구를 해소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고민에 공감하고 함께 해결책을 고민하던 가족들도 같은 고민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음에도 변화하지 않는 모습을 보다 보면 지치게 마련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느슨한 연결’입니다. 기차에서 만난 낯선 이방인처럼, 혹은 그보다는 조금 더 친밀하지만 너무 가깝지는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느슨한 연결은 1973년 미국의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타(Mark Granovetter)에 의해 제시되었으며, SNS를 비롯한 온라인을 통해 많은 사람과 확장성을 갖고 연결될 수 있는 오늘날에는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처럼 강한 연결이 아닌, 안면이 있고 적당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얻거나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싶을 때, 낯선 이방인을 만나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통해서든, 새로운 모임을 통해서든, 온라인에서의 나눔을 통해서든, 새로운 곳을 탐색하고 낯선 이와의 교류를 통해 생각지 못한 위로와 힘을 얻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고민을 안고만 있거나 가까운 주변 사람들로 도움의 범위를 한정 짓기보다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다양한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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