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히어로' 트라우마 치유 지원사업을 시작하며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듣는 직업이지만 '이야기를 하러 진료실에 올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 의 이야기만 들을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특히 대학병원에서 수련을 받다 보면 대학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접하며 교육을 받는다는 한계가 생긴다.
군대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서울 부촌 출신의 유학생과, 운전병으로 나의 출장을 동행하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울을 가본다는 친구가 한 부대에서 생활하는 곳이다. 가정 환경, 사회경제적 상태가 많이 다르더라도 병역의 의무 앞에서는 모두 평등해진다.
이러한 공간에서 마음을 돌보는 일을 하다 보면, '이야기를 하러 올 여유도 없이 힘든 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진료하다 보면 그간 잊고 있었거나 혹은 애써 외면해왔던, 여전히 사회에는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군에서 진료한 한 친구가 떠오른다. 그의 부모는 그가 기억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 부터 그와 연락을 끊었다. 어린 시절 그를 돌봐 주었던 연로한 조부모는 어느 새 그가 부양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조모는 병환이 있어 거동이 불가한 상태이며, 현재 가구에서 경제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 혼자 뿐이다. 당연한 듯 다른 친척들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중학교 때 부터 그는 일을 해 왔고, 고교는 진학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가 면제 대상이 아닌지를 알아 보았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연락이 되지 않는 부모가 생존해 있고 경제활동을 하고 있어 면제가 어렵다는 납득하기 힘든 이유를 듣게 되었다. 거동이 되지 않는 조모의 생활을 걱정하며 군생활을 이어가다 공황을 겪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임무에 애로사항이 발생했으며, 이는 부대원들의 가혹행위로 이어졌다. 트라우마 였다.
그가 진료실을 찾은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군에서는 주기적으로 힘든 마음을 체크하고 평가한다. 자살사고를 강하게 체크하여 진료의뢰가 되었는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 당연해서 문제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고 정신과 진료를 고려한 적은 더더욱 당연히 없다고 했다. 그는 그에게는 너무 당연한 극단적인 생각이 다른 친구들에게는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의외라고 했다.
진료를 받으며 그는 많이 좋아졌다. 인생에 대해서 고민할 틈도 없었고, 그의 고충이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터놓고 이야기해 볼 기회 자체가 없었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이해와 위로, 그리고 소량의 약물 치료는 상당한 효과를 냈다. 진료는 그에게 낯선 만큼이나 달가운 것이었다.
전역은 하고 싶은데 약을 받을 길이 없어서 막막하다고 했다. 슬픈 마음이 편해져서 라는 이유보다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공황이 없어야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또 절실한 이유 때문에서 였다.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추가적인 검사가 없도록 주변 지인 원장님을 수소문하여 최대한 자세히 경과를 알려주고 진료를 부탁하는 것, 그리고 그 때의 내가 처방할 수 있는 최장 기간의 약을 챙겨주는 것 뿐이었다.
이번에 우리은행과 대한 신경정신의학회가 합작하여 트라우마를 경험한 군 인원을 위한 치료 진료비 지원 사업을 한다. 물론 당국에서 많은 개선의 노력을 이어가고 있으나 여전히 군은 트라우마, 복무 부적응을 비롯하여 정신과 진료에 대한 소요가 많은 공간이다. 그 취지가 반가워 홍보를 위한 글을 쓰려 하니 불현듯 친구가 떠올랐다. 그는 잘 지내고 있을까. 그 때 이러한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고 군 생활을 하며 자세히 알게 되었던 수많은 군 내에서의 사건사고와 관련된 이들도 떠올랐다. 그간 얼마나 많은 장병들이 국가와, 서로의 소중한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또 안타깝게 희생되었는지. 그러나 부끄럽게도, 그 당시 기사를 접하며 분개하거나 아파했던 기억은 많지만 그 뒤로 그들이 얼마나 그들의 상처를 치유 받고 회복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제는 사회적 인식이 다소 개선되어, 트라우마를 경험한 이들의 상처가 몇 달, 몇 년, 심지어 수십 년이 지나도 선명할 수 있음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를 지켜주기 위해서 받은 그 상처가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선명할 수 있음에도, 우리는 하루를 바삐 살아가느라 이에 대해 너무도 무감각했다.
천안함 사건을 비롯하여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건 뿐 아니라, 그 친구와 같이 누구도 몰라주는 고통으로 힘들어 하는 이들은 지금도 부대에, 그리고 우리 사회에 흔하게 있을 것이다. 다행히 모두가 잊고 외면하는 이 사실을 잊지 않으려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는 있고, 그들은 이러한 의미 있는 제도를 만들어낸다.
마음을 다루는 것에 관한 도움은 어떤 이에게는 정말로 삶을 바꿔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은행과 학회의 이번 시도를 깊이 환영하며, 모쪼록 필요한 이들에게 소금과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두형
'우리히어로' 트라우마 치유 지원사업 홈페이지 가기>> clic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