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당산 숲 정신과, 이슬기 전문의]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연말에는 무엇이 생각나는가? 각종 연말 세일과 캐럴, 흰 눈발이 휘날리는 거리, 아파트 화단 나무마다 걸쳐져 있는 조악한 꼬마전구. 연말은 그 화려함과 더불어 더없이 사람을 쓸쓸하게 만든다. 또 이렇게 일 년이 갔구나, 허탈함이 들기도 한다.
마음이 퍽퍽해지는 건 비단 연말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꼬박꼬박 일상을 살아나가다가도 갑자기 밀려드는 고단함에 방전된다. 그저 쉬고 싶다는 마음을 넘어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살다 보면 뭐가 달라지긴 하는지 뻥 뚫린 구멍 속으로 온종일 낙하하는 기분이 든다. 이런 기분을 당신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맥 빠지고 힘없는 생각들이 더욱더 쳐지는 기분을 몰고 오고, 나쁜 기분을 양분 삼아 더 부정적인 생각으로 끌려들어 가는 기분 말이다.
가수 아이유는 ‘힘들 땐 어떻게 이겨내나요?’라는 질문에 ‘가끔 져요.’라고 답했다. 우리는 힘든 기분을 이겨내려고 발악하지만, 사실 가끔 지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내가 가끔 써먹는 방법의 하나는 ‘누구나 가슴에 삼천 원쯤은 있는 거예요.’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이다. 가슴에 속에 품은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세 장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말의 기원은 따로 있다.
2007년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쩐의 전쟁>에서 배우 신동욱은 ‘누구나 가슴에 상처 하나쯤은 있는 거예요.’라는 대사를 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자주 잊고 사는 진리이지 않은가? 하지만 촬영 당시 신동욱은 치아교정기를 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발음이 이상하게 전달되었다. 시청자들의 귀에 그 감동적인 진리는 이렇게 바뀌어 들렸다. ‘누구나 가슴에 삼천 원쯤은 있는 거예요.’
이 말은 우스운 어록으로 남아버렸지만, ‘가슴속에 숨겨둔 상처’가 떠오를 만큼 인생이 빡빡하게 느껴질 때 생각하면 잠시 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준다. 스트레스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인지적 시선과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희망이 생기기도 한다. 고작 삼천 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이를 누릴 수 있다니. 그러니 힘들고 지칠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속을 뒤져 삼천 원을 찾게 되는 것이다.
오전까지 처리하기로 한 일은 열두 시가 다 되어가도록 손도 못 대고, 친구가 보낸 메시지는 나를 비난하거나 비꼬는 것 같고, 올해 꼭 들으려고 벼르고 있던 세미나는 무심히 알람을 꺼버리는 통에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하고.
안 좋은 일들이 겹쳐 일어날수록 우리는 자기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무력감에 빠져든다. 하지만 마음속의 삼천 원을 떠올리며 한 번 피식 웃은 뒤에는 상황에 거리를 두고 내가 했던 생각을 천천히 다시 볼 수 있게 된다. 당신도 나처럼 삼천 원에 웃음을 되찾으면 좋겠지만 이 방법이 먹히지 않을 시, 실질적으로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몇 가지 전략을 써보면 어떨까?
1. 나만의 스트레스 탈출 주문 만들기
나의 주문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두가 알다시피, ‘누구나 가슴에 삼천 원쯤은 있는 거예요.’다. 방 안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 창문을 열고 환기하듯, 주문을 외우며 마음을 환기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머릿속에서 노래를 한 곡 부르기도 하고, 발음하기 어려운 아프리카 나라 이름을 다섯 개 외우기도 한다. 나의 친구는 ‘하쿠나 마타타(문제 없다는 뜻의 스와힐리어)’를 외치거나, <해리포터>에 나오는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를 마음속으로 부르짖는다. 이처럼 스트레스와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주문도 좋다. 스트레스로 꽉 닫힌 마음의 창을 조금이라도 열 수만 있다면 말이다.
2. 생각 속에 부정적인 단어 찾기
어떤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보는 것도 좋다. 위의 경우 계획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해서 짜증이 나거나 기분이 나빠졌다. 이때, 짜증이 나거나 기분이 나빠진 이유는 ‘계획대로 일을 못했기 때문에 능력이 없다.’고 자신을 비난했기 때문이다. 또한 친구의 직설적인 메시지를 받고 상처받아 우울해졌다. 결국 친구와 관계가 멀어질 거라는 부정적 예언을 했다. 오랫동안 기다리다 놓친 세미나를 못 듣게 되어 다음 일정이 다 어그러지게 될 것이라고 책망하기도 했다.
이런 생각들은 그저 머릿속에 담고 있을 때보다, 언어를 골라 말로 하거나 글로 쓸 때 더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3. 부정 단어 바꾸기
처음 할 때는 이 단계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속에서 벌어지는 부정적 생각은 자동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어렵다. 습관은 멈추는 것과 비슷하다. 대안이 생각나지 않을 시에는 2번으로 돌아가, 2번에서 발견한 ‘비난, 책망’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만 바꿔보아라. 꼭 긍정적인 단어로 바꿀 필요는 없다. ‘자신을 비난할 필요는 없었다.’, ‘부정적 예언을 하지 않아도 된다.’와 같이 자신에게 짐을 씌우는 마음에서 한발 물러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일이 어그러지는 것은 꼭 누구의 잘못일 필요는 없다. 상대에게, 나에게 화살을 돌리기 전에 그저 일어난 일이라고 잠시 생각해보자.
4.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하기
괜찮다. 정말로 괜찮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글자를 볼 수 있고, 언어로 지각할 수 있는 신체적/인지적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시작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일이 어그러진 과거가 아니라, 다시 풀어나갈 수 있는 시작점인 ‘지금’이다. 정말로 당신은 괜찮다.
마음속의 삼천 원을 생각하면 잔뜩 꼬여있던 속이 가라앉고 조금씩 온기가 스며 나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삼천 원이면 붕어빵이 아홉 개, 군고구마 한 봉지, 타코야키 여덟 알을 먹을 수 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질 수밖에 없다. 당신은 삼천 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주문으로 어떤 마음을 꾸릴 수 있을까? 결국 마음속의 상처를 삼천 원으로 바꾸는 것은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기억하자.
서울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전) 대전,서울지방병무청 병역판정의사
(전) 서울 중랑구 정신건강증진센터 상담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