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빛나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여동생의 강박증 때문에 너무나도 지칩니다.
자랑스러운 법대생이며, 수석을 도맡을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동생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공부를 하다가도 손을 계속해서 수시로 닦는 행동을 보여왔습니다. (동생말로는 손에 샤프심 가루가 번진 자국이 묻는 것이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고 했습니다.) 닦은 손을 보니, 손가락 주변에 모든 살을 뜯어놓는 행동도 심하게 있었고요. 제가 보기에는 이런 행동도 걱정할 수준이었지만, 동생의 강박증이 무척 심해진 계기가 있었습니다.
우선 저희 가족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먼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가족이 함께 있던 날 밤, 엄마가 자택에서 사고로 돌아가시는 사건을 겪은 후 저희 가족은 3년째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날도 동생은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고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동생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동생은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이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너무나 힘들어했습니다.
로스쿨 진학을 준비 중이던 동생은 엄마의 사고 이후로 공부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날 일이 자꾸만 생각나서 공부가 전혀 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더욱 다른 집중할 거리가 필요해 몇 년째 집안일만 합니다. 집 안을 뒤엎어서 청소하거나, 온갖 생활용품을 채우거나 새로이 꾸미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본인한테 쓰는 돈이 아닌 가족들 옷, 생필품, 오래 보관 가능한 음식 등 생활을 위한 부분들에 관한 소비가 매우 심해져서, 아버지가 심각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눈앞에서 가족을 잃은 사고 때문에 동생은 남은 가족에 대한 걱정과 애착을 아주 심하게 보입니다.
문단속, 창문 단속, 가스 점검 등을 매번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균 때문에 가족들이 병에 걸리기라도 할까 봐 온 집안 구석구석을 수시로 닦고, 소독제와 물티슈를 손에서 놓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주무시다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상태를 확인합니다.
또한 동생의 피부가 심각하게 망가졌습니다.
동생은 본인이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만진 후 손을 하도 많이 닦아서, 손등뿐만 아니라 팔뚝 전체가 뱀 비늘처럼 올라올 정도로 건조한 상태로 변해버렸습니다. 요즘에는 발에도 민감해져서 집에서도 욕실 실내화를 신고, 종아리마저도 닦아서 다리의 피부도 마찬가지로 변했습니다.
택배를 뜯고 정리하는 일은 동생에게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가족이 택배 상자를 절대 마음대로 집에 들일 수도 없고, 그 포장지를 본인이든 타인이든 직접 만진다거나 거실 바닥에 닿아서도 안 됩니다.
모두 소독을 거친 후 만져야 하고, 내용물만을, 어디에도 닿지 않게, 안전히 꺼내야 합니다. 그러다가 망가지는 제품도 있습니다.
하루는 새 다이어리를 시켰는데, 동생이 포장지가 허술했다며 그것을 들어다가 세면대에서 전부 물로 씻는 바람에 다이어리가 전부 젖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버려야 했습니다.
다이어리뿐만 아니라, 배달시킨 커피와 포장된 음식, 포장된 택배들이 소독 차원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바디워시나 주방세제로 닦습니다. 생수나 페트병 음료를 시켜도 마찬가지여서, 저는 물 한 번을 마음먹고 마실 수가 없습니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을 전부 벗어서 세탁실에 가져다 놔야 합니다. 동생 기준에서 오염이 가득한 옷을 입은 상태로 돌아다니거나, 집안 물건을 만지면 버럭 화를 내면서 소독제를 뿌립니다. 제가 외출 직후 밟은 모든 곳마저도 물티슈와 소독제 범벅으로 청소합니다.
물티슈를 한 박스를 사놓으면 일주일도 못 갑니다. 소독제도 작은 병이 아닌 몇 리터짜리 통으로 구매해 보관해놓고 수시로 담아 씁니다.
집안 곳곳이 소독제로 젖어 있고, 알코올 냄새로 가득합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강아지를 데려온 것과 최근 코로나 문제도 화근이었나 봅니다.
강아지를 키우며 털이 많이 날리는 일과 코로나 때문에 바깥에서 옮겨온 병균 등이 스트레스라고 했습니다. 강아지는 너무 예뻐서 돌보는 일이 즐겁지만, 그러면서도 털이 미치도록 신경 쓰인다고 합니다.
밖에서 붙어왔을지 모르는 코로나 균이 기관지에 들어가 가족들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매일 집 안 전체 및, 아버지와 제가 자는 침구 등을 쉴 새 없이 돌돌이라 불리는 테이프로 밀어대고, 핸디 청소기를 돌립니다.
동생은 외출해서는 그러지 않습니다. 오로지 내 가족만 다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뿐이어서, 자기 자신은 밖에서 세균을 마시든 더러운 것에 오염이 되든 상관없다고 합니다. 내 가족이 아니니 굳이 민감하게 굴 필요가 없다고요. 때문에 친구나,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동생이 이러한 행동과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을, 집에서만, 가족들만 알고 있습니다. 동생과 둘이서만 자취했을 당시 제가 그날도 무척 싸우고 아버지께 울면서 토로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최근에야 아셨습니다. 어딘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이토록 심각하는지는 모르셨다고 합니다. 동생은 아직도 이 사실 때문에 저를 굉장히 미워하고 원망합니다. 그러잖아도 힘들 아버지께 왜 그런 이야기를 해서, 신경 쓰이고 괴롭게 만드느냐고요. 제가 아주 나쁘다고 했습니다.
"그럼 나는 누구에게 말해?" 저도 억울해서 물었습니다.
제 주변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언니로서 동생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도 저뿐이겠지만, 매번 동생과 부딪히며 사는 사람도 저였습니다.
아버지께도 병원 치료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자기 딸이니 아버지가 나서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으십니다.
치료는 입밖에도 꺼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아버지도 알게 된 마당에, 점점 더 가족들에게 본인과 같은 생활 태도를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택배나 배달음식을 정리하는 일, 그리고 서로가 외출하고 돌아오는 직후. 수건이나 담요 하나 방바닥에 잘못 떨어뜨렸다가 먼지가 난다며 죽일 듯이 노려보는 순간 등이, 저와 동생이 가장 많이 싸우는 순간입니다. 최근에는 먼지 공포증이 생겼다면서, 먼지가 날까 봐 방 안에 커튼 하나 마음대로 여닫을 수 없게 합니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잘만 산다고, 다 놓고 산대도 아무렇지 않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말하는 것이 어느새 저의 일이 되었습니다.
동생은 자신이 고치려는 노력을 한다며, 최근에는 최대한 언니가 어떻게 행동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고, 나 많이 달라졌지? 묻습니다.
하지만 제가 마시는 물병을 바디워시로 닦지 않으면 무엇하나요. 배달음식은 본인이 아닌 제가 들여다 줬으니 오염 과정을 보지 않아서 괜찮아지면 뭐하나요. 여전히 일상 전반이 동생의 강박증 아래에 있습니다. 강박증이라는 아픔을 겪고 있는 아이가 그만하면 엄청난 노력이지, 칭찬해주려다가도. 저는 속이 좁아서 다른 부분이 여전히 절 너무 괴롭 하게 하니 결국엔 짜증을 표출하고, 화를 내니 또다시 동생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제가 미치겠다고 하니, 이제는 자기도 변하려고 노력한다며, 이건 안 닦아도 괜찮지? 이건 먼지가 심하지 않은 거지? 나 이거 만졌는데, 손 안 닦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지? 수시로 물어봅니다.
그러면 저는 하루에도 수십 번 괜찮다고, 아무 문제없다고 설명해주고 설득합니다.
그거 몇 마디 해줄 수도 있지만 이것이 매일같이 반복인 일상이 너무나도 지칩니다. 울화통이 터집니다. 아픈 애한테 왜 그래? 아픈 애니까 이해해. 아버지도, 동생 본인도 그렇게 말하니 저는 매번 공감 능력 결여에, 극심한 짜증만 내는 나쁜 언니가 된 상태입니다.
편히 쉬어야 하는 집에서 무엇 하나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집안을 돌아다녀도 먼지 한 톨 안 생기게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고, 물건 하나를 만질 때마다 눈치를 보거나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잘못 만지는 것을 발견하는 즉시, 바로 달려와서 사람이 멍해질 정도로 화를 냅니다.
그럴 때마다 동생은 항상 말합니다. 본인도 힘들고 괴롭다고. 그런 동생을 이해하고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왜 맨날 본인한테 짜증을 내냐고요. 언니라는 사람이 어떻게 정신 병원 치료나 받으라고 얘기하냐고요.
그래, 앞으로는 이해해 볼게. 나도 노력해 볼게.
매번 다짐하지만 저는 자꾸만 무너지고 맙니다. 참고 견뎌주는 일을 못해서, 갑자기 화가 솟구치며 분노하게 된 지 오래입니다.
하루는 저도 너무 화가 나서 동생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인, 먼지 쌓인 박스들을 동생 방에 잔뜩 흩뿌려 버렸습니다. 동생이 소리를 질러대며 엄청 울었습니다. 저도 씩씩거리고 있지만 그 순간 엄청난 죄인이 된 것만 같고 동생이 화가 나서 홧김에 잘못된 행동이라도 할까 봐, 저 역시 미친 듯이 힘들었습니다.
저도 너무 분노에 차고, 지쳐서 병원에 가서 제발 치료를 받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랬다가, 나중에는 제발 치료 좀 받으면 안 되냐고 진지하게 얘기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죽어도 싫다고 합니다. 혹여 치료 이력이 나중에 법조인이 되는 일에 영향이 갈까 봐 걱정하는 것도 있지만, 병원 치료를 받으면 자신이 진짜 환자가 돼서는, 자기 자신을 아주 놓아버릴 것만 같다고 했습니다. 이 이외에도 본인만의 사정과 생각이 있겠지만... 저는 네가 아픈 것을 알지만 너로 인해 같이 괴로워하는 나도 좀 생각해 달라고 했습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매일 같이 그래, 이해해야지 하다가도, 하루 한 번 이상 갈등을 겪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정신의학신문, 그리고 마음 우체국 글을 매번 읽으며 제 자신을 다독이기만 했지... 사연을 적는 것은 처음입니다.
저 또한 삶의 의욕을 겨우 끌어올리며 지내고 있습니다. 남겨진 가족의 아픔을 알기에 죽고 싶다는 생각조차 멋대로 할 수 없는 삶이 지치고 괴롭습니다.
제가 프리랜서라 강아지 산책을 제외하고는 거의 집에만 있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일도 몇 년째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데, 이 순간에도 돌돌이 미는 소리, 물티슈 뽑는 소리, 소독제를 뿌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립니다... 매일 싸우고, 이튿날이면 또 싸우고.
이런 수준이라면 동생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동생 없이는 불안과 우울, 외로움 때문에 또 죽을 것 같습니다.
동생도 떨어져 살고 싶다고 하지만 제가 이러기 때문에 같이 사는 것이니 함께 살고 싶으면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글을 적는다고 해결방안이 바로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에라도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고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저와 싸웠다고 또 집안 전체에 알코올을 뿌려 청소하기 시작한 동생을 뒤로하고, 울면서 적는 제가 무슨 생각인가 싶습니다.
모쪼록,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빛나래입니다. 힘겹게 써주신 사연을, 가슴 아프게 읽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도 여전히 남아있어 무기력한 가운데 동생의 강박증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시네요. 이런 상황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참 막막하고 무거운 마음일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염려되는 점은, 사연자님의 가족 모두 어머님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애도, 그리고 동생의 강박증에 대해서, '가족과 함께 있으며 각자의 역할을 하다 보면 어떻게든 지나가겠지’라고 생각해오신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동생의 강박증은 말씀하신 정도라면 치료적 접근이 필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치료는 본인의 협조와 동의 아래 이뤄져야 하는 것이므로, 이 답변에서는 먼저 가족 내 애도 과정과 함께 동생을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3년 전, 한 남편이 아내를, 두 자매가 엄마를 잃었습니다. 사고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애도, 서로의 슬픔을 나누고 보듬는 과정은 어째서인지 어려웠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버지는 남은 딸들을 돌볼 책임이 우선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고, 이때 슬픔을 내보이기보다는 바쁘게 일을 하며 지내신 것 같습니다. 반면 동생은 외부의 걱정보다는 집 안에서의 삶, 남은 가족의 위생과 안전에 더 신경을 쓰며 기존의 강박 성향이 강화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는 경우, 상실에 대한 언급으로 더 고통스러워질 거라는 생각에 각자의 슬픔이나 죄책감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서로 말하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각자의 삶에 집중하고 쉬쉬하며 넘어가느라 긴 시간을 보내기도 하죠. 하지만 애도 과정에서는 고인에 대한 기억과 상실감에 대해 대화할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가족 내에서 나누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면 이를 대신할 친구의 도움이나, 때로는 치료적 도움을 활용해서라도 다뤄져야 하는 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님 중 한 분의 사망 시 남아있는 부모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자녀에 대한 책임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부모의 적절하고 충분한 애도 반응은 남아있는 자녀가 자신의 애도를 부적절하다고 느끼지 않고 잘 다룰 수 있도록 예시가 되어줍니다.
동생의 경우, 애도 과정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외상적 경험을 함께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동생은 방에서 평소처럼 공부를 하다 어머니의 죽음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강박증의 유무와 상관없이 아주 큰 외상적 사건에 해당됩니다. 가까운 사람, 그것도 어머니의 죽음인 데다 가장 먼저 시신을 발견한 경우로, 조속히 정신과적 평가와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자면, 동생은 자신이 깨어 있는데도 공부를 하느라 엄마의 사고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하려 할 때마다 엄마의 시신을 발견했던 장면과 충격이 떠올랐을 수 있고, 가족과의 감정 교류가 두렵고 엄두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내 공부는 제쳐두고 남은 가족들을 지키는 것에 지나친 집착을 보였을 가능성, 애도를 위해 필요한 상실감의 공유마저도 계속 회피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간 이에 대한 치료적 접근이 없었다면 상당히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외상 반응 이후의 강박증 악화에 대해 추측해 보면, 우선 동생은 가족의 안전과 위생을 챙기는 과정에서 자신의 죄책감이나 불안이 조절되는 경험을 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강박 행동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 처음에는 어머니의 상실과 관련한 슬픔과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는 피난처였겠지만, 점차 오염에 관한 생각으로 불안할 때마다 강박 행동을 통해 해소하는 식으로 변화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강박증 발생의 '학습 이론'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동생은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격리시키고 강박 행동과 통제에 집착하는 형태로 자신의 마음을 지켜내 왔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상실 이전의 동생을 생각해 보더라도, 스트레스를 꽤나 받아가면서까지 꼼꼼하게 공부에 매진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 같고, 당시에는 감정의 통제가 학업에 성과를 거두는 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까지 대응하기에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동생이 현재 보이는 강박 증상의 정도와 그 결과를 고려했을 때 이에 대한 치료 필요성은 명확해 보입니다. 오염과 관련된 강박 행동에 쓰는 시간이 상당히 많고, 이로 인해 일상생활과 미래를 위한 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물치료와 비약물치료 등 도움이 되는 치료 방법들을 함께 활용하는 것이 좋겠고, 가족을 적당히 챙기고 공부나 업무를 잘해 나가는 정도의 꼼꼼함으로 그 정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가족의 범위 바깥에서 강박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점은 치료에 긍정적인 요소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동생이 치료의지가 없다는 것이 문제인데, 이 답변만으로 동생분을 설득하거나 도움을 드리기는 어렵겠지요. 다만, "엄마의 죽음은 절대로 동생분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과, "치료 과정에서 다뤄지는 부분은 강박 증상만이 아니라, 동생분의 깊은 상처와 상실감, 철저히 통제하며 감춰야만 했던 내적 문제들일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상처와 트라우마는 소독약으로는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사연자님의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 합니다. 사연자님 또한 아직은 슬픔이 달래지지 않으셨을 수 있고, 그런 이유에서인지 동생과 헤어지는 것은 엄두가 안 나시는 것 같아요. 사실, 동생뿐 아니라 사연자님도 어머니를 잃었다는 것은 같으니까요. 먼저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의 사고를 알아채고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사연자님 또한 갖고 계실지도 모르겠어요.
일단 글에서는 사연자님 본인의 애도 과정이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재의 괴로움은 몇 년 간의 무기력증으로 표현하셨는데,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어떻게 통과하셨는지는 보이지 않네요. 혹시라도 그 과정의 부재로 인해, 아직도 동생이 곁에 없으면 불안과 우울, 외로움에 시달리시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가족 내의 치료라는 것이, 그나마 건강하고 자원이 있는 사람부터 시작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사연자님이 우선 심리적인 분리와 함께, 치료 관계라는 안전지대를 찾으셔도 좋겠습니다. 사연에는 올리지 못하신 가족 내의 관계와 소통 문제, 어머니의 사고 내용과 애도 과정에서 나누지 못하신 것들이 있다면 더더욱이요. 아직 미래의 일이라 조심스럽지만, 한 명의 가족이 치료를 통해서 나아지는 것을 보면 다른 가족들도 뒤따라 적절한 치료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가족 내에서 도저히 극복되지 않을 문제들이라면 어떤 방법이 있을 지에 대해서도 치료적 논의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도, 동생의 문제도 사연자님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용기를 내 보시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 [우리는 저마다의 속도로 슬픔을 통과한다], 브룩 노엘, 패멀라 D. 블레어, 글항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