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빛나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40대 싱글맘입니다.
4년 전 남편은 갑자기 빚만 남기고 행방불명되어 경찰에 가출 신고를 하고 저는 아이와 간신히 월셋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당시 아이가 어려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80 만원 밖에 벌지 못했고 법적으로 이혼 상태가 아니라 복지혜택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사라지기 이미 몇 년 전부터 남편은 생활비를 제대로 가져오지 않아 경제적 어려움이 심각해서 전 불면증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었고 알코올 의존도 심했습니다. 끼니를 거의 술로 해결할 정도였으니까요. 남편이 폭력적이거나 학대를 한 건 아니었어요. 다만 본인이 한 거짓말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에게만 그런 게 아니고 밖에서도 그러고 다녔더군요... 집으로 빚쟁이들이 찾아오는 건 드라마에나 나오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저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집안 물건에 빨간색 차압 딱지가 붙는 것도 직접 보게 되었네요.
그런 상태에서 가장의 책임을 저버리고 혼자 사라져 버린 남편에 대한 배신감이 말도 못 했지만 당장 아이와 저의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날마다 복지 과에 찾아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식당에서 서빙과 설거지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다행히 좋은 사장님을 만나 아이와 기본적인 생활은 할 수 있게 되었고, 소송을 진행해 지금은 법적으로 이혼 판결이 난 상태입니다. 그리고 작년부터 주 5일 근무를 하는 일반 회사에 다니게 되어 생활은 점점 안정이 되어 갔습니다. 올해 초에는 임대아파트에도 당첨이 되었고, 국가장학금을 받으며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사 자격증 공부도 시작했습니다. 우연히 소개로 만난 사람과 연애도 시작했고요.
주변 사람들은 혼자 아이 키우면서 그 고생을 하더니 정말 잘됐다고 잘 살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상황이 안정되어 갈수록 마음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공허하고 점점 무기력해 지기만 합니다. 술도 자제할 수가 없어요. 오히려 먹고사는 문제만 생각해야 할 때에는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힘들다는 생각조차도 못했어요. 어릴 적부터 남에게 힘들다는 말을 못 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고민 상담을 많이 해주곤 했는데 그게 문제였을까요... 언제부터 인가 항상 씩씩하고 멀쩡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생긴 것 같습니다. 남들 앞에선 항상 밝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보이는데 집에선 그렇지 않아요. 주말이면 아이 앞에서도 하루 종일 술만 마십니다. 왜 상황이 좋아지고 있는데도 제 상태는 더 나빠지는 건지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요즘은 출근할 때 가슴이 답답하고 숨 쉬기가 힘들 때가 자주 있고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도 뛰쳐나가 도망가고 싶어 집니다. 불면증도 다시 시작돼서 잠을 못 자고 새벽까지 뒤척이고요.
이런 답답한 심정을 누구한테 얘기라도 하고 싶지만 공감을 얻을 수 없을 까 봐 용기도 안 납니다. 남자 친구도 불안장애로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어서 처음엔 서로의 상처를 잘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히려 자꾸 남자 친구의 눈치를 살피게 되고 상태를 신경 쓰게 되니까 더 제 얘기를 꺼내기가 어려워요. 육아도 일도 연애도 너무 지쳤어요.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은 건 아닌데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기분만 신경 쓰고 살아서 정작 제 마음은 어떻게 챙겨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답답합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빛나래입니다.
올려주신 사연 잘 보았습니다. 우선 사연자님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무던히 애쓰고 고군분투하셨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부분이 참 대단하시다, 애 많이 쓰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그동안의 사연자님은, 본인의 감정을 대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남편의 문제와 관련된 불안감도 매우 크셨을 테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도 마치 세상과의 싸움같이 느껴지셨을 거예요. 자신과 아이의 생존이 최우선이셨을 테니, 당연히 그럴 여유를 부릴 새 없이 일단 덮어두고서 하루하루 버티고 살아내야 할 수밖에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필요한 도움을 받을 방법을 찾고 직장을 알아보며 소송 준비에 미래를 위한 공부까지, 그 자체만으로 대단하신 거라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찌 보면 그런 상황에 자신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 문제에 빠져드는 경우보다 사연자님이 훨씬 강한 사람이며 강한 엄마라는 생각도 드네요.
사연자님께선, 항상 다른 사람 기분만 신경 쓰고 사느라 내 마음을 챙기는 방법을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자신의 패턴을, 소위 [착한 사람 콤플렉스]로 인식하신 것 같아요.
우선, 사연자님이 본인 역할을 책임 있게 수행 중이시라는 것을 기억하며 스스로 마음을 챙기셨으면 좋겠어요. 강한 사람이자 강한 엄마로 애쓰며 사는 자신의 모습을 우선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며 출발하셨음 해요.
남편과의 문제가 있기 전까지 사연자님이 살아오신 과정은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지금의 문제에 대해 상담과 치료의 도움을 받으신다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성장과정과 과거의 경험까지 돌이켜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과다하게 느끼곤 했다거나, 그와 연관된 경험들이 누적되어 있진 않으신지 궁금한 부분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마음을 챙기는 것보다 순종적으로 눈치를 살피는 것이, 버림을 받지 않기 위한 하나의 생존전략인 경우들이 있거든요.
사연 내용으로 돌아와 보자면, 기존의 불안한 가정생활에 더불어 4년 전의 충격적인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으신 것이 진심으로 놀라운 부분입니다. 그 전까지의 경험이 어떠하셨든, 이 부분이 사연자님이 건강한 어른 역할을 하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어서, 그 동기와 에너지원이 무엇인지도 살펴보고 강화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가장 우선 추정되는 것은 당연히 아이 엄마로서의 역할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책임감에 쫓기는 삶을 사시다가도, 남편에 대한 원망이나 세상에 대한 분노 같은 것들이 부정적인 모습으로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아야 하셨을 테고, 스스로 마음을 챙기기는 어려우시니까 자꾸만 술을 드시는지도 모르겠어요.
사람은 본인의 양면적인 모습이 스스로 인정도 되고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필요로 해요. 사연자님의 경우, 애쓰고 사는 강한 엄마로서의 자신의 모습과, 아직 해결이 덜 된 내적 문제들과 부정적 감정들이 숙제로 남아있는 자신의 모습이 잘 통합되는 과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의 개념으로 생각을 해보면, 아직은 그런 통합이 잘 이뤄지지 못한 상태에서 '나의 힘들고 어두운 부분들이 알려진다면 사람들은 나를 떠날지도 몰라'라는 인식이 있으신지도 모르겠어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상대방에게 맞춰주느라 감정적 피로가 누적되면서도 또 그 상대방에게 어느 정도 의존을 하게 되는 인간 마음의 양면성을 이해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남을 돕는 직업이라는 연결성이 있긴 하지만, 제대로 공부하고 자격을 얻어 사회복지사 일로 승화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 같아요. 다만, 한 명의 사람으로서는 자기감정을 알아채고 거기에 충실하며 적절하게 이를 표현하는 것을 연습하고 습득해 나가는 것도 중요해 보입니다.
몇 가지 방법을 말씀드려 볼 텐데, 말로는 간단하지만 그 실천에는 많은 시간과 시도가 필요해요. 구체적인 상황과 경험들을 다뤄야 하고,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치료에 대한 용기를 내셔서 증상의 조절과 더불어 꾸준히 함께 연습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하루쯤 나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보낸다거나 영화나 음식, 시간 활용 같은 삶의 여러 측면에 대해 스스로 선호하는 바와 의견을 만들어 보세요. 본인이 무엇을 원하고 느끼는지로 관심과 초점을 이동시켜 보시고 나는 무엇을 선호하는지 정리해 보세요.
- 대인관계나 직장에서 다른 사람의 욕구를 우선하거나 희생하는 상황을 나열해 보세요. 자신에 대한 관찰자가 되어보세요.
- 중요한 사람들, 예를 들면 남자 친구나 직장상사와의 대인관계에서 주고받는 비율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시고 그 목록을 작성해 보세요. 관계가 어떻게 균형에서 벗어나 있는지 아실 수 있어요. 나는 마음을 다쳐가며 다방면으로 상대방을 위하는데 상대방이 주는 건 경제적 안정뿐인 경우도 있어요.
- 쉬운 요구와 표현부터 해 보세요. 본인의 감정이나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나 부정적 평가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시고 연습해보세요.
- 나를 쥐고 흔드는 인간관계를 피하세요. 상대방의 인생 속으로 녹아드는 바람에 나 자신에 대한 느낌을 가질 수 없는 관계는 없었는지 점검도 해보시면 좋겠어요. 워낙 어렵고 복잡해서 꼭 함께 다뤄야 할 주제이기는 해요.
- 직장에서도 모든 일을 혼자 짊어지지 마시고 필요한 경우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넘기는 시도도 해 보세요.
사연자님의 패턴이 처음 생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존중하세요. 그때는 정서적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었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좋지 않으니까 내려놔야 할 때가 된 건지도 몰라요. 변화가 느리다고 의기소침해지지 않게 주의하시고 조금씩 일어나는 변화를 스스로에게 칭찬하며 보상을 주세요. 사연자님의 건강한 부분이 더 잘 작동하며 마음도 더 편안해지시길 바랄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 [새로운 나를 여는 열쇠], 제프리 영, 열음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