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정정엽 전문의]
‘Unnie’, ‘Oppa’, ‘Hyung’, ‘Nuna’, ‘Maknae’, ‘Daebak’, ‘Byuntae’, ‘Jinjja’
영어 단어를 아무리 많이 아는 사람이라도 위 영단어는 처음 볼 것이다. 당신은 저 단어들의 뜻을 몇 개나 알고 있는가? 과연 정말로 처음 접하는 단어일까? 다시 한번 천천히 스펠링을 따라 발음해보자. 어딘가 익숙한 단어가 슬그머니 입 밖으로 새어 나올 것이다. 위 단어는 순서대로 ‘언니’, ‘오빠’, ‘형’, ‘누나’, ‘막내’, ‘대박’, ‘변태’, ‘진짜’를 가리킨다. 소리 내어 읽어본 사람이라면 한국어 단어를 들리는 그대로 받아 적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 아티스트가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고, 2021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대박을 치면서 드라마와 음악 등 한국 문화가 각광받고 있다. 외국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응원하기 위해 위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문화는 곧 그 나라의 언어가 퍼진다는 말과 같다.
최근,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사전으로 통하는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에 여러 한국어 단어가 등재되고 있다. 올해(2021년)만 총 26개의 한국어가 실렸다. 지난 45여 년 20개의 단어가 등재된 것에 비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어떤 단어가 등재되었는지 그 단어를 살펴보면 외국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특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류 열풍이 일기 전에 옥스퍼드 사전에 실렸던 한글들은 ‘Hangul(한글), sijo(시조), taekwondo(태권도), Chaebol(재벌), ondol(온돌), yangban(양반)’ 등 역사가 반영된 것들이었다. 또한 역사적이기 때문에 한국어로 밖에 부를 수 없는 대체 불가의 단어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이번에 등재된 단어를 보면 ‘deabak(대박), hallyu(한류), k-(한국의), mukbang(먹방), noona(누나), oppa(오빠), unni(언니)’ 등 비교적 최근의 한국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즐겁고 다이나믹한 한국 문화의 반영으로 보이며, 굉장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정말 즐겁고 좋은 것, 그게 다일까? 문화는 우리를 보편적으로 형성하고 보여주는 것이지 개개인을 말하지는 않는다. 재미있는 문화가 국민의 웰빙 수준을 나타내는 것은 아닌 것이다. 재밌고 유쾌한 한국 문화의 세계적 열풍을 바탕으로, 우리의 현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 행복 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에서 매년 행복 수치 상위를 차지하는 건 북유럽 국가들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61위(2021년), 행복 지수는 5.845로 2020년보다 더 떨어졌다.
‘휘게(Hygge)’라는 단어를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휘게는 세계 행복 보고서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덴마크의 단어다. 안락하고 아늑한 상태라는 뜻으로, 주로 소박한 일상에서의 행복감을 찾는 덴마크식 생활방식을 나타낸다. 옥스퍼드 사전에는 ‘만족감이나 행복감을 불러일으키는 편안함과 쾌적함’으로 등재되어 있다.
‘휘게(Hygge)’는 덴마크 문화의 결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당신은 편안함과 쾌적함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에어컨, 푹신한 소파, 높은 천장 등등. 덴마크인들은 휘게라는 단어에서 양초, 핫 초콜릿, 오버사이즈 스웨터, 사랑하는 단어를 연상시킨다고 한다. 언뜻 소박해 보이지만 따뜻하고 안정적인 느낌이 든다. 이렇듯 덴마크에 형성된 편안함과 쾌적함은 일상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여기서 덴마크의 행복 지수가 높은 이유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다이나믹하고 유쾌한 한국 문화의 이면에서 놓친 것들을 말이다.
덴마크 언어학자 Carsten Levisen에 따르면 덴마크 문화의 핵심 개념으로 정의하는 20개 단어에는 ‘hygge(편안함)’, ‘lykke(행복)’, ‘jantelov(Jante의 법칙)’ 또는 ‘tryghed(안전 또는 안전)’과 같은 단어가 포함되어있다고 한다. 이 단어들은 단순히 일차원적 의미가 아니라, 덴마크의 자아상과 문화에서 중요한 언어적 개념을 나타낸다. 언어가 문화를 보여주듯, 문화는 그 나라와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를 보여준다.
휘게란 단순하고 일시적인 편안함과 쾌적함이 아니라, 그러한 삶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에 행복 지수 2위인 나라의 힘이 아닐까? 그렇다면 삶의 태도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휘게의 개념을 연구해온 덴마크의 인류학자 Jeppe Linnet은 휘게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사회적 환경에 달려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휘게가 뜻하는 안전한 환경, 좋아하는 사람, 쾌적함, 편안함, 맛있는 음식의 바탕에는 안전한 환경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즉 휘게는 안전, 평등 및 공동체를 반영한다. 덴마크는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휘게야 말로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들의 웰빙을 만드는데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기도 하다.
한국은 예로부터 ‘흥의 민족’이라고 불렸다. 한국의 흥이 세계에 전해져, 한국이라는 나라가 잘 즐기고 재미있게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유쾌함’, ‘흥’으로 비쳐지는 것 이면의 한국 문화 및 사회를 바라보아야 한다. 흥의 민족이 행복지수가 61위인 이유를 말이다. 고단함을 잊기 위한 노동요인지, 즐기기보다는 보여주기 위한 춤인지, 나의 주관보다 집단의 트렌드를 따르기 위한 참여인지?
‘자기 수용(self acception)’은 자신의 장점과 단점까지 제대로 인정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남에게 비치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치 기준으로 삼을 때, 자신의 감정 또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하는 줄 알았는데, 막상 혼자만의 시간을 더 선호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본인이 굉장히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자기 자신에 연관된 일이 아니면 친절을 베푸는 데 인색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한다. 하지만 장점이든 단점이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다음에 어떻게 자신을 형성해나갈지 방향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안전, 평등 및 공동체’가 잘 갖추어진 환경일수록 자기 수용이 용이하다.
언어에는 그 나라의 정서가 스며있다. 한국은 점점 더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에 올라간 다음 한글은 무엇일까? 어떤 한글이 올라가면 좋을지 생각해보자.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미래전략 이사, 사무총장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자문위원회 위원
보건복지부 감사자문위원회 위원
교육청 학교폭력대책 심의위원회 위원
생명존중정책민관협의회 위원, 산림청 산림치유포럼 이사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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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를 듣는 것 같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많은 사람이 도움 받고 있다는 걸 꼭 기억해주세요!"
"선생님의 글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