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정정엽 전문의]

 

매회 많은 기대와 사랑을 받은 의학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가 12회로 종영했다(2021년 09월 기준). 이미 유머와 재치로 시청자에게 눈도장을 받아왔던 배우 조정석의 코미디적 면모와 더불어, 웃음과 감동의 균형을 잘 이루며 시즌 1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 외에도 다양한 인기 비결이 있겠지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역시나 병원이라는 배경일 것이다.

병원은 삶과 죽음, 슬픔과 기쁨, 분노, 경이로움, 열정 등 다양한 면모가 모여 있는 공간이다. 이야기가 넘쳐나며,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 때문에 더욱 예민하고 다루기 어려운 소재이기도 하다. 무겁고 긴장된 분위기 때문에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의학 드라마의 어떠한 지점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일까?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포함하여 의학 드라마는 불패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성공을 거두어왔다. ‘골든타임’, ‘굿 닥터’, ‘뉴하트’, ‘하얀 거탑’ 등등. 병원을 배경으로 한 만큼 사건이 끝도 없이 일어나며 생과 사를 오가는 긴장감이 꾸준히 생성된다. 환자들은 저마다의 인생과 사연이 존재한다. 의학 드라마라고 꼭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만 보여주지 않는다. 연애, 가족, 환자, 의사윤리 등 인간적인 삶을 통틀어 다룬다.

의사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려보라. 아마도 푸근하고 인간적인 면보다 지적이고 냉철한 이미지가 그려질 것이다. 우리는 의사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의사가 병원 밖에서 가운을 벗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짜장면을 질질 흘리면서 먹거나, 상처에 침을 바르는 모습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이렇듯, 의학 드라마는 어딘가 어렵게 느껴졌던 의사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타인의 삶을 드라마 속에서는 어렵지 않게 공감한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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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뿐만이 아니다. 의학 드라마는 환자, 환자의 보호자 등을 조명하며 타인의 인생을 섬세하게 조명한다. 의학 드라마를 보면서 긴장되고, 슬프고, 환희를 느끼는 것은 어느새 드라마 속 인물의 삶이 시청자의 가슴에 스몄기 때문일 것이다. 병원은 인간의 생과 사, 시작과 끝에 가까운 공간으로서, 삶에 가장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인상 깊은 에피소드를 통해 슬기로운 인간 생활을 들여다보자!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 2화 에피소드 중에는 심장 이식을 기다리는 두 명의 아이가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보호자 은지의 엄마와 민찬이의 엄마가 등장한다. 은지는 ‘바드(심실 보조 장치)’를 달고 심장 이식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은지 엄마는 이제 막 병원에 입원한 민찬이의 엄마를 위로하고 도시락을 나누어주며 용기를 준다. 하지만 민찬이는 기증된 심장의 조건에 맞아 오래 기다려왔던 은지보다 먼저 심장을 이식받게 된다. 은지 엄마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민찬이 엄마에게 축하를 건넨다. 그리고 밤에 혼자 공원에 나가 오열한다.

우리는 은지 엄마가 어떠한 기분일지 감히 추측하지 못한다. 인생에는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걸 다시금 확인할 뿐이다.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Sartre)는 인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실존적 요소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한계를 뛰어넘는 자기 인식을 통해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신을 만들어나간다고 했다.

실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여기에 있는 나를 인식하는 것이다. 아마도 어떤 이들은 오래 기다려온 은지보다 민찬이가 먼저 심장이식을 받게 된 것에 대해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며 분노할 수도 있고, 다음번엔 내 차례가 되게 해 달라며 신께 기도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은지 엄마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잘 견뎌내어 아이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다른 심장 기증이 나올 때까지.

은지 엄마는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아이에 대한 안쓰러움을 저녁 울음으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버텨온 고단한 지난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다. 씩씩하게 병원 식당에 앉아 도시락을 먹으면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엄마이자 그녀 자신으로서 현실에서 굳건히 서 있는 것이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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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 그건 슬픈 일일까 기쁜 일일까. 우리의 삶이 특별한 지점은 우리에게 너무나 다양한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정확히는, 우리가 그 수많은 사건 속에 서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때문에 슬퍼질 것을 알면서도 슬픈 음악을 듣고, 마음이 불편할 것을 알면서도 재난 소설을 찾는다.

기쁜 일에서 기쁨을 느끼는 건 당연해 보이지만, 슬프고 괴로운 일을 겪은 후 생의 기쁨을 느끼는 일은 어딘가 아름다운 것처럼.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일은 참 아이러니하다. 별다를 것도 없으면서 동시에 저마다 소중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니 말이다.

의학 드라마는 생과 사의 간극에 놓여있는 사람들, 그들을 지켜보는 또 다른 사람들, 그 간극에 참여하여 막중한 책임을 어깨에 진 사람들을 조명한다. 너무나 인간답지 않은가?

 

인간 생활을 유지하는 동안 즉, 현실의 삶을 살아가면서 매번 죽음을 의식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실제로 존재한다는 자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죽음을 자각한다는 것은 곧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삶의 유한성을 깨달은 존재는 똑같은 매일이 아니라, 하루하루 새로운 날을 맞이한다.

삶의 유한성을 간접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학 드라마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그리고 개인의 존재를 생각하게 만든다. 비슷한 에피소드가 반복되어도 의학 드라마의 불패가 가능한 이유는 그만큼 우리에게 ‘생명은 소중하다’는 것을 매번 각인시켜주기 때문일 수도 있다.

‘병원은 아픈 사람이 방문하는 곳’이라는 1차원적인 시각에서 조금 더 넓게 눈을 떠보자. 종합병원은 매일 아기들이 태어나는 산부인과와 장례식장이 같은 원내에 있다.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이해하기에 이만큼 좋은 장소가 또 있을까?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수면센터
대한민국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회 위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미래전략 이사, 사무총장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자문위원회 위원
보건복지부 감사자문위원회 위원
교육청 학교폭력대책 심의위원회 위원
생명존중정책민관협의회 위원, 산림청 산림치유포럼 이사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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