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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1편> 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멜로리의 깨달음

영화의 막바지, 멜로리는 두 눈을 가리고 나무배를 저어 천신만고 끝에 도피처를 찾는다. 그곳은 다름 아닌 맹인학교이다. 원래부터 눈이 안 보여 괴물을 볼 일이 없고, 그래서 괴물에게 당할 염려도 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맹인학교는 평화롭다.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그곳에서 멜로리는 번뜩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일순 버드박스의 새들을 모두 자유롭게 풀어주고, 드디어 아이들에게도 이름을 지어준다. 소년(Boy)과 소녀(Girl)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따, 톰과 올림피아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여전히 괴물은 남아있고, 멜로리는 여전히 두 눈이 보인다. 언제라도 괴물에게 당할지 모르는 위태한 상황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 맹인들이야 원래부터 안전했지만, 그곳에 있다고 해서 멜로리가 온전히 안전해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멜로리는 내면의 평화를 찾는다. 맹인 아이들을 보며 멜로리가 깨닫게 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괴물의 정체, 공황의 뿌리

사실, 멜로리는 괴물이 등장하기 전부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뱃속에 아이를 임신한 채 이혼을 한 직후였다. 탄생과 상실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던 그녀의 마음속은 이미 트라우마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 이름 짓기를 주저하며 입양 포스터를 만지작 거리던 그녀의 무의식 속엔 진작부터 커다란 벽이 세워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멜로리는 괴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고독에 가두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녀 마음속의 고통스러운 고독은 사실 그 이전부터 조금씩 자라왔던 것일 수 있다. 괴물은 그런 멜로리의 마음속 상처와 고독을 불안과 생존이라는 주제로 현현시킨 상징물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공황발작의 증상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환자들은 첫 번째 공황 발작을 경험하기 이전부터 무의식 속 갈등과 트라우마를 이미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공황은 아무 이상 없이 편안하게 지내던 마음에 뜻 없이 벼락처럼 떨어지는 불행이 아니다. 그보다, 공황은 오래전부터 곪아오던 마음속의 갈등이 단지 외부로 드러나게 된 현상인 경우가 더 많다.

 

공황과 괴물이 두려운 이유는 둘 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둘은 모두 보이지 않던 무의식 속 상처가 눈에 보이는 의식 위로 튀어나온 결과물들이다.

사진_Netflix
사진_Netflix

 

#”어차피 소용없어요”

인지치료의 훈련과 다양한 상담과정을 통해 환자들은 점점 이러한 깊은 무의식 속 상처와 마주하게 되곤 한다. 하지만 단어의 정의에서부터 알 수 있듯 무의식이란 곧 ‘알 수 없는 것’이다. 무의식은 인지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눈으로 볼 수 없다. 결국 자신의 공황에 대해 깊이 알아갈수록 이해하기 힘든 무저의 트라우마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불안의 근원이 필연적으로 불가해(不可解)하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앞서 이야기한 인지치료 또한 결국 소용이 없는 것 아닐까. 공황의 실마리를 쫓아가 도달하게 될 종착역이 결국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무의식의 트라우마라고 한다면 무엇을 위해 고통스러운 인지치료의 훈련을 견뎌내야 하는 것일까. 어차피 평생 괴물을 피할 수 없다면 뭐하러 버드박스를 들고 다니며 촉각을 곤두세운 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멜로리가 제아무리 툼레이더 아닌 원더우먼이 된다 하더라도 괴물의 정체는 결국 파악할 수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실제로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환자분들은 “어차피 소용없는 거 같아요…” 라며 한탄 섞인 회의를 품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실제 진료 현장에서 환자들을 보면, 치료를 거듭하면서 분명히 증상이 좋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환자들은 여전히 공황을 느끼지만 조금씩 덜 불안해하고, 여전히 불안하지만 조금씩 더 편안해할 수 있게 된다. 조금씩 스스로의 불안을 잠재우고, 불안과 함께 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된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물론 인지치료의 과정에서 설명하였듯, 1차적으로는 공황발작의 과정과 그 대처법에 대해 환자들이 점점 더 잘 알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의 기전은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바로, 이해할 수 없던 자신의 무의식을 스스로 감싸 안을 수 있게 되는 과정이다. 불안에서 정말로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스스로의 무의식을 낱낱이 파헤쳐 모든 것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될 때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 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환자들이 정말 편안함을 되찾게 되는 순간은 바로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될 때이다.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있던 무의식 깊은 곳의 커다란 상처를 스스로 보듬을 수 있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호흡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해도, 이해하지 못해도, 알 수 없이 두려워도, 너무나 고통스러워도, 그래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껴안을 수 있게 되며 우리는 진정한 치유와 성장으로 나아간다.

사진_freepik
사진_freepik

 

#그녀가 깨달았던 것

멜로리가 맹인학교에서 깨달은 것 또한 그러한 것일 수 있다. 멜로리는 맹인학교에서 행복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물론 그들이 평화로울 수 있는 이유는 괴물을 볼 일이 없어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동안 스스로의 처절함과 고독을 되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볼 수 없음에도 천진난만하게 행복한 그들을 보며, 자신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절박하게 지내왔는가를 무심히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멜로리는, 자신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차단하며 고독하게 지내 온 이유가 생존 때문이었다고만 여겨왔다. 괴물의 공포로부터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맹인학교의 광장에 선 그 순간, 사실 그녀를 그토록 고립시켜왔던 범인이 실은 그녀 스스로의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괴물을 쳐다봐서는 안된다는 사실, 심연의 트라우마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점점 더 깊은 구멍 속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위협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곧 그 위협이 눈앞에 닥쳤다는 뜻은 아니다. 괴물은 분명 볼 수 없지만, 365일 24시간 항상 곁에 있지 않다. 괴물은 불현듯 찾아오지만, 하루 중엔 괴물이 없는 시간이 더욱 많다. 심지어 괴물의 방문은 버드박스로 어느 정도 미리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멜로리의 마음속에 자라난 두려움과 불안은 실제로 24시간, 단 한시도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괴롭히고 있었다. 그녀를 한순간의 편안함도 찾지 못하고 점점 더 고립되게 만든 것은 바로 불안감, 볼 수 없다는 두려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맹인학교의 아이들을 보면 그러하듯,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곧 두려워해야만 하는 상태라는 것은 아니다. 볼 수 없음에도, 눈으로 보아 이해할 수 없다는 불편함과 불안함과 항상 함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분명 행복과 편안함을 찾을 수 있다. 멜로리가 불현듯 깨달았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바깥에 거대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있다고 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서, 행복과 편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그 간단하지만 새로운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과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멜로리에게 움트게 할 수 있었다.

 

#필연적 고독

우리는 모두 무의식 깊은 곳에 크고 작은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간다. 하지만 무의식 깊은 곳으로 침잠해버린 그 상처는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스스로의 무의식을 명명백백히 바라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누군가에게 마음의 일부를 허용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다. 누군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바라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해할 수 없다는 도저한 불편함, 불안함, 두려움이 인도하는 회피와 고립은 결국 우리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고립시키고 만다. 우리들의 필연적인 고독은 바로 그 구조에서 비롯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멜로리가 맹인학교에서 평화를 깨달았던 것은 괴물을 직시하고, 스스로의 무의식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다. 필연적인 고독의 구조를 부수고 명쾌한 시야를 되찾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구조 자체를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맹목의 두려움은 필연적이며, 그 안에서도 평화를 찾을 수 있고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무의식 속의 거대한 괴물을 쳐다볼 수 없다는 공포와, 그럼에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는 아이러니한 유혹 사이의 날 선 불안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괴물이 나타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고독과 상처의 벽을 허물 수 있었다.

 

#괴물과 함께

버드박스는 괴물을 무찌르며 끝나지 않는다. 괴물의 정체는 결국 알 수 없고, 괴물의 존재도 결국 사라지지 않는다. 괴물은 어느 순간 이유 없이 나타났듯, 여전히 뜻 없이 그곳에 남아있다. 영화가 결말을 짓는 순간은 괴물의 존재 여부와 관계가 없다. 영화는 멜로리의 내면이 변화할 때에 그 숨 가쁜 도피와 분투의 여정을 마무리 짓는다.

어쩌면 공황도, 우리 삶의 필연적이라는 고독과 괴로움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진정한 안식과 행복은 불안과 괴로움의 끝, 그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끝이 보이지 않아도 그것을 껴안을 수 있을 때에, 그 안의 안식과 행복을 발견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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