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가 읽어주는 영화, 스물세 번째 이야기

[정신의학신문 : 의정부 성모사랑 정신과, 유길상 전문의] 

 

# 현재 우리의 세태

몇 달 사이, 공군과 해군에서 여성 장교 성추행 사건이 잇달았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들이 성추행 사건을 군 기관에 신고했지만, 적절한 조사와 치료 과정을 받지 못했고 결국 자살했다는 점입니다. 성폭행 피해자와 가족들은 보호는커녕, 오히려 “사건을 크게 만들면 진급이 누락될 것이다,” “분란을 일으키면 퇴직금을 받을 수 없다.”는 등의 회유와 협박을 받았습니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현재, 과연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최근 일련의 기사를 접하며 <김복동>이라는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사진_네이버영화 '김복동' 스틸컷
사진_네이버영화 '김복동' 스틸컷

 

# 과거 우리의 상처

영화 <김복동>은 일제시대, 10대에 위안부 피해를 입은 김복동 할머니의 삶을 조명한 영화입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14세 나이에 일본군에게 속아 위안부로 끌려갔습니다. 이후 8년 동안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으로 끌려 다니며 일본군 성노예로 고통받다 1948년에 귀국하였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김복동 할머니는 과거 받은 상처에 대해서 가족 및 지인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주변으로 받을 낙인과 차별이 두려워서였을 것 같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1992년, 그동안 침묵을 깨고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1993년에는 유엔인권위원회에 피해사실을 공개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에 참석해 일본 정부의 과거 행태에 대해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위안부 사건에 대해 회피적인 태도로 일관해왔습니다. 안타깝게도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지 못하고 2019년 1월, 93세로 별세했습니다. 영화는 굴곡진 현대사에,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한 개인의 슬펐지만, 동시에 당당했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진_네이버영화 '김복동' 스틸컷
사진_네이버영화 '김복동' 스틸컷

 

# 진료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란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후 발생하는 정신과 질환입니다. 대표적인 원인은 전쟁, 태풍, 지진과 같은 자현 재해, 심각한 교통사고, 성폭행 혹은 살인 사건 등입니다. 정신과에는 교통사고 경험자, 성폭행 사건 피해자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은 다음과 같은 증상을 보입니다.

1. 사건의 재경험 : 외상적 사건을 일상생활 혹은 꿈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합니다.

2. 회피 증상 : 외상 사건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활동, 장소, 사람, 대화를 피하려고 합니다.

3. 과각성 증상 : 작은 자극에도 쉽게 놀라고 예민해집니다.

4. 인지와 기분의 변화 : 감정 기복, 흥미 저하를 느끼고 집중력 저하도 발생합니다.

 

성폭행 피해자들은 사건 이후 생활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상대방에 대한 심한 분노감과 함께 사건을 피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신뢰가 깨져 대인관계도 힘들어집니다. 뇌 깊은 곳에 사건이 저장되어, 의지와 상관없이 외상 사건이 떠올라 공부 혹은 일에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약물 치료, 지지적 정신치료, 안구운동 민감소실 재처리 요법 (Eye movement desensitization and reprocessing, EMDR) 등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치료들은 보조적인 수단일 뿐입니다. 치료의 핵심은 가해자와의 빠른 분리와 적법한 절차를 통한 진정성 있는 사과입니다.

여전히 많은 성폭행 피해자분들이 정신과 진료실을 찾습니다. 아마도 성폭행 피해자 중 극히 일부만 정신과 진료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 사회는 범죄를 예방하고, 사건 발생 후, 피해자를 보호하려 노력하고 있나요?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사건을 축소, 은폐하기에만 급급한 건 아닌가요? 여군 장교 성추행 자살 기사를 접한 후 김복동 할머니가 경험한 끔찍한 과거가 지금도 반복되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유길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성모사랑 정신건강의학과
가톨릭중앙의료원 수련의, 전공의
(전) 포천시 정신건강증진센터 자문의
(전) 의정부 청소년 쉼터 상담의
대한정신건강재단 해피마인드 상담의, 대기업, 보건소 등에서 다수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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